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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쉰 네 번째 이야기
2013년 2월 21일 (목)

가난한 선비의 다짐

예로부터 감추어져 있는 땅은
실로 사람을 통해 이름이 나고
훌륭한 사람을 내는 것은
진정 땅의 신령함 덕분이지만
사람과 땅이 전해지는 것은
오직 덕이 향기로워서라네
그러나 선비는 평생 곤궁하기도 하고
산은 만고에 푸르기만 하네
모를레라 저 푸른 산은
얼마나 많은 이들을 거쳐 왔는지
지금 나는 초가에 앉아
성현이 남기신 경전 대하네
경전은 마음을 수양할 수 있고
내 초가는 몸을 보양할 수 있네
그런대로 누실명에 차운하고
삼가 안락정을 사모하노라

古來地秘
實由人名
篤生人豪
宲賴地靈
人地之傳
唯德之馨
士有百年窮
山有萬古靑
未知彼靑岑
閱盡幾白丁
今也當吾廬
對殘經
殘經可以養心
吾廬足以養形
聊次陋室銘
窃慕顔樂亭

- 박영석(朴永錫, 1735∼1801)
「누실명(陋室銘)」
『만취정유고(晩翠亭遺稿)』


  영조 초년에 태어나 순조 초년에 생을 마친 만취(晩翠) 박영석은 중인(中人)이라는 신분의 한계로 인해 불우하게 살다 간 문인이다. 만취는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이극(爾極)으로 서울 순화방(順化坊) 누각동(樓閣洞)에 살면서 학동들을 가르치고 저보(邸報)를 필사해 주는 일을 하였는데, 생계가 여의치 않아 부인이 삯바느질을 하며 생계를 보조해야 했다고 한다.

  중인이라는 신분의 제약과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현실의 무게 앞에 만취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하고 자신과 처지가 비슷했던 옛사람의 삶을 음미함으로써 위로받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실제로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에 수록된 그에 대한 약전(略傳)에서는 그가 항상 방안에 꼿꼿이 앉아 『논어』 읽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성묘나 조문이 아니면 대문을 나서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비로서 자신의 포부를 펴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 사람들을 우리는 은사라고 부른다. 옛사람 중에서 은사의 전형으로 도잠(陶潛)을 빼놓을 수 없는데 만취 역시 도잠의 「귀거래사(歸去來辭)」, 「귀전원거(歸田園居)」, 「잡시(雜詩)」 등 여러 작품에 차운하며 불우한 자신의 삶을 고고한 은사(隱士)의 삶과 동일시하기도 하였다.

  위의 작품은 중당(中唐) 시기의 문인 유우석(劉禹錫, 772~842)이 지은 동명의 다음 작품에 차운한 것이다.

산은 높이에 달린 것이 아니고 신선이 살아야 이름이 나며, 물은 깊이에 달린 것이 아니고 용이 살아야 영험한 것이라네. 이곳이 누추한 방이기는 하나 오직 나의 덕은 향기롭네. 이끼는 섬돌을 올라와 푸르고 풀빛은 주렴에 스며들어 푸르구나. 담소하는 사람 중엔 큰 선비가 있고 왕래하는 사람 중엔 천박한 이가 없네. 꾸미지 않은 거문고를 탈 만하고 불경을 읽을 만하여라. 귀를 어지럽히는 음악소리 들리지 않고 몸을 지치게 하는 공문서가 없으니 남양 제갈량의 초가집이나 서촉 양자운의 정자1)로구나. 공자께서도 말하셨지,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2) [山不在高, 有仙則名. 水不在深, 有龍則靈. 斯是陋室, 惟吾德馨. 苔痕上階綠, 草色入簾靑. 談笑有鴻儒, 往來無白丁. 可以調素琴, 閱金經. 無絲竹之亂耳, 無案牘之勞形. 南陽諸葛盧, 西蜀子雲亭. 孔子云, 何陋之有?]

1) 양자운의 정자는 자가 자운인 한나라 때 양웅(揚雄)이 독서하던 곳을 가리키는데, 이곳이 서촉 지방인 사천성(四川省) 면양현(綿陽縣)에 있기 때문에 한 말이다.
2) 공자께서 동이족(東夷族)의 지역에서 살고 싶다고 하자, 혹자가 말하기를 “그곳은 누추하니,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였다. 이에 공자가 대답하기를 “군자가 거처한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子欲居九夷 或曰 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 하였다. 구이는 동방을 가리킨다. 『논어』 「자한(子罕)」


  유우석은 감찰어사(監察禦史)가 되어 왕숙문(王叔文), 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께 정치 개혁에 나섰지만 실패하여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누실명」은 대체로 이 시기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은사의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만취는 이러한 은사의 이상적인 삶이 불우한 현실에 처한 자신의 마음을 다잡아줄 수 있는 지침이 된다고 생각하고 차운한 것이다. 차운한 작품에서 만취는 사람이나 땅이나 세상에 알려지고 쓰이기 위해서는 훌륭한 덕을 갖추어야 하지만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사람은 한 평생 곤궁을 감내하고 사는 것이며 산은 영원히 푸를 뿐이라고 노래하였다. 이어서 곤궁한 삶을 살고 있는 자신 역시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덕을 쌓아 향기를 발산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였다.

  작품의 마지막 구에 나오는 ‘안락정(顔樂亭)’은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에 있는 정자로, 북송(北宋) 때 교서태수(膠西太守)로 부임한 공주한(孔周翰)이 안회(顔回)의 사당 앞에 예부터 버려져 있던 우물을 정비하고 그 옆에 정자를 짓고는 ‘안락(顔樂)’이라고 현판을 건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정자에 소식(蘇軾)이 기문을 짓고 정호(程顥)가 명(銘)을 지었는데 모두 안회의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삶을 흠모하고 자신을 경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글쓴이 : 변구일(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