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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墨子》강의--신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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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강독 강좌를 처음 시작할 때는 강의내용이 '시경'과 '주역' 이외에 주로 공자와 노자 두 사람을 중심으로 진행하였습니다. '논어'와 '노자'가 중국사상의 2대 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교양과목이라는 강좌의 성격에 비추어 그 이상을 다루기가 어렵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강의가 거듭되면서 본의 아니게 조금씩 범위가 넓어졌습니다. 학파간의 차이점에 대한 질문도 계속 제기되고 또 서로 대비해서 설명하는 것이 편리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순자(荀子) 한비자(韓非子) 묵자(墨子)에 대해서도 언급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불교(佛敎) 양명학(陽明學)과 신유학(新儒學)의 기본적 성격에 대해서도 다루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예시(例示)하는 정도였다가 나중에는 따로 장(章)을 내어 다루게 되었습니다. 따로 장을 내어 다룬다고 하지만 범위가 늘어나는 만큼 각 장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더 줄어들기 때문에 결국 개요만 소개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점이 매우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표면만 스치고 지나가는 세태를 비판하면서 정작 우리의 강의도 그 짝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곤혹스럽기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부터 진행하는 강의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그런 점을 미리 양해해야 합니다. 강의의 범위를 좁혀서 진행하려고 합니다. 한 학파로부터 한 개의 코드만 읽어내자는 것이지요. 물론 무리입니다만 불가피한 선택입니다.

지금부터 함께 읽으려고 하는 '묵자' '순자' '한비자' 등은 비주류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묵가(墨家)는 유가(儒家)와 함께 당시에는 현학(顯學)이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비주류로 물러났습니다만 당시에는 가장 강력한 주류학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순자' 역시 유가라는 점에서 주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한비자'는 법가사상을 집대성한 법가를 대표하는 사상입니다. 천하통일을 주도한 사상이란 점에서 '법가'를 비주류라고 하기에 다소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묵자' '순자' '한비자'는 중국사상의 전체 흐름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비주류에 속한다고 해야 합니다.

주류사상, 비주류사상이라는 구분과 관련하여 잠시 사상일반의 사회적 위상에 대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상은 자각적(自覺的)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자각적이라는 의미는 개인을 그 사상의 담당자로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경우의 개인이 자연인으로서의 개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상의 담당자로서의 개인에 대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자각적 체계로서의 사상과 그 사상의 담당자로서의 개인은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기보다는 사상의 사회적 존재양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으로서의 묵자와 순자, 한비자에 대하여 특별한 의미부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지요.


사상은 개인에 앞서서 반드시 '사상적 과제'가 먼저 존재합니다. '누구의' 사상이기에 앞서 반드시 '무엇'에 관한 사상입니다. 사상이란 일정한 사회적 조건에서 생성하는 것이지요. 그 사회적 조건이 변화하면 사상도 사상사의 장(場)으로 물러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상을 사회역사 속에 해소시킬 수 없는 이유가 방금 이야기한 그 자각적 구조 때문입니다. 자각적 구조 때문에 사상 자체로서의 독자성을 부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독자성은 역시 제한적 의미로 이해하는 태도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사상이란 독자성에 앞서 시대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경우든 시대가 사상을 낳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따라서 학파간의 차이는 그 시대의 과제를 인식하는 관점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각 학파간의 차별화가 진행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각 학파간의 침투가 진행되는 것이 사상사의 발전과정입니다.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상호 침투합니다.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과제를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각 학파가 전개하는 논리적 정합성은 당대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지적 수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학파간의 차이는 접근로와 강조점이 조금씩 다를 뿐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주류사상이든 비주류 사상이든 결국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부터 다루게 되는 '묵자' '순자' '한비자' 등에 대해서는 그 차이에 주목하기보다는 그 강조점(强調點)에 유의하기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각 학파마다 한 개씩의 코드만 찾아내자고 한 것이지요.

1)묵자와 '묵자'

제자백가 중에서 공자 다음으로 그 인간적 면모가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는 사람이 아마 묵자(墨子)일 것입니다. 공자의 인간적 면모가 뚜렷한 까닭은 '논어'가 공자의 대화집(對話集)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하여 노자(老子) 장자(莊子)는 물론이고 맹자(孟子)나 순자(荀子)의 경우도 그 인간적 이미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에 비하여 묵자의 이미지는 훨씬 뚜렷합니다. 묵자는 사상과 실천에 있어서는 물론이며 그 이외에도 여러 가지 면에서 분명한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첫째로 그의 이름과 관련된 것으로 하층계급의 이미지입니다.
묵(墨)이란 우리말로 먹입니다만 묵자(墨子)의 묵(墨)은 죄인의 이마에 먹으로 자자(刺字)하는 묵형(墨刑)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묵가(墨家)란 형벌을 받은 죄인들의 집단을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설령 형벌과 죄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고 묵가의 검은 색은 노역(奴役)과 노동주의(勞動主義)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검은 노동복을 입고 전쟁을 반대하고 허례(虛禮)와 허식(虛飾)을 배격하며, 근로(勤勞)와 절용(節用)을 주장하는 하층계급이나 공인(工人)들의 집단이 묵가라는 것입니다.

 묵자는 성이 적(翟)이라는 설이 있습니다.(淸 周亮工) 그의 이름을 묵적(墨翟)이라고 한 것은 묵형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히는 뜻에서 그것을 성(姓)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이지요. 과거에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그것을 이름에 밝힌다는 것은 심상한 것이 아니지요. 형벌을 받았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밝힌다는 것은 사람들이 국가의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언하는 것이지요. 오히려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반체제적 성격을 분명히 선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묵(墨)은 성씨라기보다 학파의 집단적인 이름이라는 주장이 좀더 설득력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묵자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백성이 국가의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을 때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사태가 일어난다는 것이지요(民不畏威 則大威至 : 老子) 당시는 혁명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묵가는 기층민중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통치집단의 정당성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좌파조직의 좌파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묵(墨)은 목수의 연장 가운데 하나인 먹줄(繩)의 의미로 읽기도 합니다. 먹줄은 목수들이 직선을 긋기 위해 쓰는 연장이지요. 그래서 법도(法度)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또는 엄격한 규율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또 '묵자'에는 묵자가 방성기구(防城機具)를 만들고 수레의 빗장을 제작하였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에 묵자를 공인이나 하층계급출신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묵자 자신이 그러한 계층출신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묵자의 사상이 하층의 노동계급을 대변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것이지요.
  
둘째로는 근검 절용하며 실천궁행(實踐躬行)하는 모습입니다. 검소한 실천가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히려 묵가를 비판하는 글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만 이 점에 대해서만은 모든 비판자들의 견해가 대체로 일치하고 있습니다.

 맹자에 따르면 "묵자는 보편적 사랑(兼愛)을 주장하여 정수리에서 무릎까지 다 닳아 없어진다 하더라도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가(儒家)가 주공(周公)을 모델로 하였다면 묵가의 모델은 하(夏)나라의 우(禹)임금입니다. 우임금은 황하의 치수를 담당하여 장딴지와 정강이의 털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신명을 바쳐 일하였던 사람입니다. 자기 집 앞을 세 번이나 그냥 지나간 것으로 유명한 임금입니다. 묵가들의 검소하고 실천적인 모습은 묵돌부득검(墨堗不得黔)이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묵자의 집에는 아궁이에 불을 때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였기 때문에 굴뚝에 검정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자신들의 이상적 모델을 유가의 모델보다 역사적으로 더 윗대인 우(禹)임금에까지 소급하여 설정함으로써 학파의 권위를 높이려하였다는 견해도 없지 않습니다만 묵가가 유가와는 그 사회적 기반을 달리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묵자는 일찍이 유학에 입문하였으나 유가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여 비유(非儒)를 천명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유가(儒家)란 예를 번잡하게 하여 귀족들에게 기생하는 무리라는 것이 묵자의 유가관(儒家觀)입니다. 우임금의 실천궁행을 모델로 삼은 것은 유가의 주봉건제가 아닌 하나라의 공동체적 질서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묵자는 제자들에게 우(禹)임금을 배울 것을 주장하여 거칠고 남루한 의복도 고맙게 생각하며 나막신이나 짚신에 만족하며 밤낮으로 쉬지 않고 몸소 실천하는 것을 근본 도리로 삼도록 가르쳤습니다. 우(禹)임금의 길을 따르지 않는 자는 묵가가 될 수 없음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묵가 집단이란 이처럼 헌신적 실천을 강조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몸에 살이 붙을 겨를이 없어 누구나 깡말랐고 살갗 또한 먹빛처럼 검었기 때문에 묵(墨)이란 별명이 붙었다고도 하였습니다. '장자'에도 묵가를 평하여 "살아서는 죽도록 일만 하고 죽어서도 후한 장례 대신 박장(薄葬)에 만족해야 했으니, 그 길은 너무나 각박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묵자는 다른 학파의 사람들과는 확실하게 구별되는 매우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회의 기층민중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며 검소한 삶을 영위하고 신명을 다하여 실천궁행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묵자'는 다른 책보다 난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묵자의 인간적 면모가 잘 나타나 있고, 또 그 사상적 기반이 분명하게 천명되어 있기 때문에 난해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예제를 함께 읽어 가는 동안에 묵자의 이미지가 더욱 분명해지고 다른 학파와의 차이가 부각되리라고 생각됩니다.
묵자에 관한 '사기'의 기록은 단 24자입니다. 묵적(墨翟)은 송나라 대부로서 성을 방위하는 기술이 뛰어났으며 절용을 주장하였다. 공자와 동시대 또는 후세의 사람이라고 한다는 기록이 그것입니다.

 현재의 통설은 묵자(BC.479-381)는 은(殷)나라 유민(遺民)들의 나라인 송(宋)출신으로서 주(周) 봉건제(封建制)로의 복귀를 반대하고 우(禹)시대의 공동체 사회를 지향하며, 일생동안 검은 옷을 입고 반전(反戰) 평화(平和) 평등(平等)사상을 주장하고 실천한 기층민중 출신의 혁신주의자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묵자'는 묵자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논어'와 마찬가지로 후대의 제자들이 스승의 언행을 모아서 편찬한 것입니다. 원래는 71편이었다고 하였으나(班固의 漢書藝文志) 현재는 53편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제자백가들의 책 중에서 '묵자'가 가장 난해한 것으로 알려진 까닭은 대쪽(竹簡)이 망실되고 뒤바뀐 채로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체계를 세워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오랫동안 도가(道家)의 경전인 '도장(道藏)'에 끼어 있었습니다. 청대(淸代)에 와서야 필원(畢沅ㆍ1730-1797)에 의해서 정리되어 '묵자주(墨子注)'16권으로 따로 출간됩니다. 그제야 처음으로 '묵자'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셈입니다. 그러나 1894년 손이양(孫詒讓)의 '묵자한고(墨子閒稿)' 15권이 출간됨으로써 비로소 뜻을 통해 읽을 수 있게 되었을 정도로 오랫동안 잊혀졌던 책입니다. 민국초기에 양계초(梁啓超) 호적(胡適) 등과 같은 비교적 진보적인 학자들이 주를 달고 분류함으로써 오늘날의 '묵자'로 정리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묵자가 난해할 수밖에 없는 또 한 가지 이유로는 '묵자'는 그 문장이 간결하고 쓸데없는 설명 즉 일체의 논변(論辯)이 없기 때문입니다. '묵자'의 이러한 면을 풍자한 예화가 '한비자'에 나옵니다. 진(秦)나라 임금이 딸을 진(晋)나라 공자(公子)에게 출가시켰습니다. 그 딸을 시집보낼 때 70명의 첩(妾)을 아름다운 비단옷을 입혀 딸려보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공자(公子)는 그 첩들을 사랑하고 그 딸은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논변이 많으면 그 핵심을 놓친다는 것을 비유로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묵자가 이러한 이유로 일체의 논변을 삼가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간결한 문장과 농축된 의미를 읽어내기가 그만큼 더 어려워진 셈이지요.
현재 전하는 '묵자'는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모두 53편입니다. 이 53편이 5부 15권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묵자의 중심사상은 제2부를 구성하고 있는 제2권에서 제9권까지의 25편에 개진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묵자의 10대 사상으로 알려진 그의 주장이 이 부분에 실려 있습니다. 우리가 묵자사상을 고루 개괄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편명(篇名)을 통해서 내용을 짐작해보지요. 상현(尙賢) 상동(尙同) 겸애(兼愛) 비공(非攻) 절용(節用) 절장(節葬) 천지(天志) 명귀(明鬼) 비악(非樂) 비명(非命) 등 10편입니다. 각 편이 대개 상중하로 구성되어 있어서 모두 25편입니다. 마지막의 2편을 제외하고 모든 편이 자묵자왈(子墨子曰)로 시작되고 있어서 묵자의 제자들이 기록하였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묵자'에는 그 이외에도 묵자의 가르침을 요약한 부분 그리고 논리학과 자연과학, 묵자의 언행, 방어전술 교본 등이 실려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묵자'는 읽혀지지 않았습니다.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묵자'는 사문(斯文)의 난적(亂賊)이었습니다. '묵자' 전편이 번역된 것도 불과 몇 년 전의 일입니다. 번역자가 가까운 지인입니다. 비전공인 나로서는 가까운 지인이 묵자연구자란 사실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후의 연구업적들도 제때에 읽어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지요.

2) 묵자의 현실인식

 공자와 묵자는 다같이 춘추전국시대의 사회적 상황을 '사회적 위기'로 파악하였습니다. 무도(無道)하고, 불인(不仁)하고, 불의(不義)한 이기적이고 파멸적인 시대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인식에 있어서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묵자는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3가지의 고통을 받고 있는 바, 주린 자는 먹을 것이 없고, 추운 자는 입을 옷이 없고, 일하는 자는 쉴 틈이 없다(有三患 飢者不食 寒者不衣 勞者不息)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묵자의 이러한 현실인식에서 묵자가 역시 기층민중의 고통과 현실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인식에 근거하여 묵자는 겸애(兼愛)라는 보편적 박애주의와 교리(交利)라는 상생(相生)이론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을 지침으로 하여 연대(連帶)라는 실천적 방식을 통하여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면의 실천적 과제로서 반전(反戰) 평화주의(平和主義)의 기치를 내걸고 헌신적으로 방어전쟁에 참여하였습니다. 묵자사상이 매우 넓은 범위에 걸쳐 있습니다만 우리는 2가지 점에 초점을 두기로 하겠습니다. 겸애(兼愛)와 반전평화주의를 묵자사상의 핵심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묵자는 그의 사상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그것의 실천에 있어서도 매우 훌륭한 모범을 보입니다. 실천방법이 개인주의적이거나 개량주의적이지 않음은 물론이고, 언제나 집단적이고 조직적이며 철저한 규율로서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강고한 조직과 엄격한 규율을 가진 집단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묵가는 불 속에도 뛰어 들고 칼날 위에도 올라설 뿐 아니라 죽는 한이 있더라고 발길을 돌리는 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皆可使赴火踏刃 死不施踵 : '淮南子') 아마 이러한 특징 때문에 전국시대(戰國時代), 그리고 진초(秦初)까지만 하더라도 묵가는 유가와 함께 가장 큰 세력을 떨칠 수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가장 큰 학파는 유가와 묵가이며(一世之顯學 儒墨也 : '韓非子') 공자와 묵자의 제자들이 천하에 가득하다고 하였습니다.(孔墨之弟子徒屬 滿天下 : '呂氏春秋')

'회남자(淮南子)'를 쓴 유안(劉安 BC.178-122)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묵가가 활동하였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사마천(司馬遷 BC.145-86)이 '사기'를 쓰던 기원전 1세기경에는 이미 묵가는 자취를 감추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한무제(漢武帝 BC.140-87)때 동중서(董仲舒 BC.179-93)의 건의로 유학(儒學)이 국교가 되면서 묵가가 탄압되었고 해외로 망명한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 시기가 대체로 BC.100년경입니다. 진(秦), 한(漢)이래 사회적 격동기가 종식되고 토지사유를 중심으로 하는 지주 관료중심의 신분사회로 정착되면서 묵가는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상하의 계층적 차별을 무시하는 평등주의 사상이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맹자는 이러한 겸애사상을 비현실적이며 비인간적인 엄숙주의로 매도합니다. 요컨대 묵가는 그 사상의 사회적 기반이 와해되면서 함께 소멸되었다고 해야 합니다. 기층민중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그들을 조직하여 세습귀족 중심의 사회를 개혁하려고 하였던 최초의 좌파(左派)사상과 좌파운동은 결과적으로 새로운 지배집단의 등장과 때를 같이하여 소멸하게 됩니다. 그리고 2천년이 지난 후인 19세기말에 와서야 비로소 유교사회의 와해와 때를 같이 하여 재조명됩니다. 2천년만의 복권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지요. '묵자'의 기구한 운명은 민중들의 그것만큼이나 유장한 흑암의 세월을 견뎌온 셈입니다. 20세기 초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중국에 소개되면서 신청년운동과 함께 '묵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습니다.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으로부터 부정적 평가를 받습니다. 제자백가 중 가장 위대한 경험론자, 평등론자로 평가받으면서도 하느님 사상(天志論)과 비폭력 사상 때문에 유물론과 계급투쟁의 적으로 간주됩니다. 한편 우파로부터는 세습과 상속을 반대하는 그의 평등사상 때문에 여전히 배척되는 기구한 운명을 다시 반복하게 됩니다.

 공자가 춘추시대 말기의 사상가라고 본다면 묵자는 전국시대(BC.475-221) 초기의 사상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는 기원전 11세기 이래의 혈연 중심의 귀족봉건제(宗法社會)가 급격히 붕괴되고 새로운 비귀족적 지주계층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제가 태동하는 시기입니다. BC. 8세기 이래 중국고대사회는 청동기에서 철제문명기로 접어들면서 토지생산력이 급격히 상승하여 봉건제후들간에 서서히 경제적 교류와 정치적 통합이 진행됩니다. 토지의 사유화가 다투어 진행됨에 따라 지주계층이 성립되고 또한 상인을 중심으로 하는 시장경제도 발전하게 됩니다. 이 시기의 사회적 변화에 대하여는 '논어'편에서 이야기하였습니다만 새로운 행정적, 경제적 및 군사적 이유로 도시의 발달을 가져오게 됩니다. 당연히 종래의 혈연중심의 인간관계가 새로운 것으로 변화하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이에 대한 수많은 담론들이 제자백가를 통하여 제기됩니다.

 공자는 서주(西周)이래의 예악(禮樂)에 나타난 귀족중심의 통치질서를 새로운 지식인(君子)의 자기수양과 덕치(德治)의 이념을 통하여 회복(維新)하려고 노력하였지요. 이에 반하여 묵자는 종래 귀족 지배계층의 행동규범인 예악(禮樂)을 철저히 부정하고 유가의 덕치이념 대신에 생산에 참여하는 모든 인민의 철저한 공동적 연대(兼相愛)와 물질적 상호이익증진(交相利)를 통하여 당시의 사회를 새로이 조직하려고 하였습니다.

유가와는 달리 숙명론(宿命論)을 배격하고 인간의 실천의지 즉 힘(力)을 강조합니다. 실천의지를 추동(推動)하기 위한 장치로서 귀(鬼)와 신(神)의 존재를 상정하고, 그리고 천자의 절대적 통치권을 주장합니다. 만민평등의 공리주의(公利主義)와 현자독재론(賢者獨裁論)을 표방합니다. 묵가학설의 이러한 개혁성과 민중성은 유가사상과 대항하면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번에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러한 과도기가 끝나고 중국사회의 역사발전이 진한(秦漢)이래로 토지사유를 중심으로 하는 지주 관료계층의 엄격한 가부장적 신분사회로 정착되면서 묵가학파는 사라지게 됩니다. 상하의 계층적 차별을 무시하고 평등주의를 주장하는 묵가학설은 결국 그 학설의 사회경제적인 기반의 와해와 함께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3) '묵자' 예제(例題)
  
聖人以天下爲事者 必知亂之所自起 焉能治之 不知亂之所自起 則不能治. 譬之 醫之攻人之疾者然 必知疾之所自起 焉能攻誌 不知疾之所自起 則不能攻 治亂者 何獨不然(兼愛)
 
天下爲事者(천하위사자) : 천하의 일을 도모하는 사람.
亂之所自起(난지소자기) : 혼란의 근본 원인.
焉(언) : 乃와 같은 뜻.
攻(공) : 이 경우는 의사의 처방과 치료.
  
"천하를 다스리는 성인은 반드시 혼란이 일어나는 원인을 알아야 다스릴 수 있다. 혼란의 원인을 알지 못한다면 다스릴 수가 없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의사가 병을 고치는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그 병의 원인을 알아야 병을 고칠 수 있으며 병의 원인을 알지 못하면 고칠 수 없는 것이다. 사회의 혼란을 다스리는 것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묵자사상의 핵심을 담고 있는 겸애편(兼愛篇) 상(上)의 첫 구절입니다. 사회적 혼란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매우 논리 정연하게 전개해 갑니다. 비유도 적절합니다. 문장이 반복되기 때문에 핵심적인 구절만을 뽑아서 소개하겠습니다. 묵자는 혼란의 궁극적 원인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야기되는 것이라는 결론을 제시합니다.

天下之亂物 皆起不相愛"사회의 혼란은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군신(君臣) 부자(父子) 형제(兄弟)간에도 자기를 앞세우고 자기만을 사랑하고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기 때문에 혼란이 일어난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묵자는 천하의 이로움을 일으키고 천하의 해로움을 제거해야 하는 것이 인인(仁人)의 도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천하의 해로움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국(國)과 국(國)이 서로 공격하고, 가(家)와 가(家)가 서로 찬탈하는 것이며 이것은 자기의 국(國), 자기의 가(家), 그리고 자기(自己)만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본문을 소개해둡니다.
  
子墨子曰,仁人之所以爲事者 必興天下之利 除去天下之害 以此爲事者也 然則天下之利何也 天下之害何也 子墨子言曰,今若國之與國之相攻 家之與家之相纂 人之與人之相賊 君臣不惠忠 父子不慈孝 兄弟不和調 則此天下之害也
  
묵자는 천하의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결국 어떠한 사태로 전락하는가를 매우 설득력 있게 전개합니다. 소위 묵자가 규정하는 해지대자(害之大者) 즉 가장 우려할만한 사태입니다. 본문을 소개하겠습니다.
  
天下之人 皆不相愛 强必執弱 富必侮貧 貴必傲賤 詐必欺愚
凡天下禍纂怨恨 其所以起者 以不相愛生也

"천하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강자는 반드시 약자를 억누르고, 부자는 반드시 가난한 사람을 능멸하고, 귀한 사람은 반드시 천한 사람에게 오만하며, 간사한 자들은 반드시 어리석은 사람들을 속이게 될 것이다. 이처럼 천하의 화와 찬탈과 원한이 생겨나는 근본적인 원인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묵자는 모든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이롭게 해주도록 하는 법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묵자의 사상인 겸애(兼愛)와 교리(交利)가 제시됩니다. 이 부분이 묵자의 겸애사상과 교리상의 원전이기 때문에 원문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겸상애와 교리지법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묵자가 말하기를 그것은 다른 나라를 자기 나라 보듯이 하고, 다른 가(家) 보기를 자기 가(家) 보듯이 하고, 다른 사람보기를 자기 보듯이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以兼相愛 交相利之法 易之 然則兼相愛 交相利之法 將奈何哉
子墨子言 視人之國若視其國 視人之家若視其家 視人之身若視其身


 겸애(兼愛)는 별애(別愛)의 반대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겸애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똑같이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평등주의, 박애주의입니다. 묵자는 세상의 혼란은 바로 나와 남을 구별하는 별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역설하고 나아가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상리(相利)의 관계를 만들어나갈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상리의 관계는 개인의 태도나 개인의 윤리적 차원을 넘어서는 구조와 제도의 문제임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도적 법제적 내용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묵자'에는 이러한 제도적 장치에 대하여는 특별한 언급이 없습니다. 애정(愛情)과 연대(連帶)라는 원칙적 주장에 머무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若使天下 兼相愛 愛人若愛其身 惡施不孝
"만약 천하로 하여금 서로 겸애하게 하여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한다면' 어찌 불효가 있을 수 있겠는가?"
  
故天下兼相愛則治 相惡則亂 故子墨子曰 不可以不勸愛人者此也
"그러므로 천하가 서로 겸애하면 평화롭고 서로 증오하면 혼란해지는 것이다. 묵자가 네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 까닭이 이와 같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 원문에서 매우 낯익은 구절을 발견할 것입니다. '愛人若愛其身'이 그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구절이 그것입니다. '視人之身 若視其身'이란 구절도 같은 구조입니다. 성경구절과 너무 일치하고 있음에 놀라울 뿐입니다.

 비단 이 원문구절뿐만 아니라 묵자의 하느님 사상(天志)은 기독교의 사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사랑이듯이 묵자의 하느님 역시 겸애이기 때문이지요. 묵자가 중국에서 자취를 감춘 때가 BC.100년경이었기 때문에 아기 예수가 태어날 때 찾아온 동방박사가 망명(亡命) 묵가(墨家)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다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정보과학관 휴게실에 '兼治別亂'이란 액자(額子)가 걸려 있는 것 알고 있습니까? 내가 쓴 글씨입니다. 겸애하면 평화롭고(治) 차별하면 어지러워진다는 뜻이며 물론 묵자의 글에서 성구(成句)한 것입니다.

 묵자의 겸(兼)은 유가의 별(別)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 별이야 말로 공동체적 구조를 파괴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심각한 해악(害惡)이라는 것이지요. 나와 남의 차별에서 시작하여 계급과 계급, 지역과 지역, 집단과 집단간의 차별로 확대되는 것이지요. 가(家)와 가(家), 국(國)과 국(國)의 쟁투가 그것입니다.
묵자는 해지대자(害之大者) 즉 세상을 어지럽히는 가장 큰 해악은 바로 서로 차별하는 것(交別者)이라고 주장합니다.

 "큰 나라가 약소국을 공격하고, 큰 家가 작은 家를 어지럽히고, 강자가 약자를 겁탈하고, 다수가 소수를 힘으로 억압하고, 간사한 자가 어리석은 자를 속이고, 신분이 높은 사람이 천한 사람들에게 오만하게 대하는 것 이것이 천하의 해로움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오늘날의 세계질서와 우리의 사회적 현실을 이야기하는 듯하다는 생각을 금치 못합니다.
大國之攻小國 大家之亂小家 强之劫弱 衆之暴寡
詐之謀愚 貴之傲賤 此天下之害也.(兼愛)


다음으로 묵자의 반전(反戰) 평화론(平和論)에 대하여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묵자의 반전평화를 읽으면서 반전평화의 문제가 참으로 오래된 과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잊고 있지만 반전평화는 한반도의 가장 절박한 당면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착찹한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묵자는 어느 편(篇)에서나 대단히 많은 예화를 열거해 가면서 자기의 주장을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비공편(非攻篇)도 예외가 아닙니다만 일부만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묵자는 공격전쟁을 반대하는 논리를 펴기 전에 먼저 당시의 일반적 관념을 비판합니다. 상투화된 사고를 반성하게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묵자는 비공편에서 먼저 기존의 잘못된 관념을 깨뜨립니다. 본문을 모두 소개하지는 않겠습니다. 그 내용을 따라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묵자다운 논리전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 한 사람이 남의 과수원에 들어가서 복숭아를 훔쳤다고 하자. 사람들은 그를 비난할 것이고 위정자는 그를 잡아 벌할 것이다. 왜? 남을 해치고 자기를 이롭게 하였기 때문이다. 남의 개, 돼지, 닭을 훔친 사람은 그 불의함이 복숭아를 훔친 사람보다 더 심하다. 왜? 남을 해친 정도가 더 심하기 때문이다. 남을 더욱 많이 해치면 그 불인(不仁)도 그만큼 심하게 되고 죄도 더 무거워지는 것이다. 남의 마구간에 들어가 말이나 소를 훔친 자는 그 불의함이 개, 돼지나 닭을 훔친 자보다 더욱 심하다. 남을 해친 정도가 더욱 심하기 때문이다. 남을 해치는 정도가 크면 클수록 불인도 그만큼 심하게 되고 죄도 무거워지는 것이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옷을 뺏거나 창이나 칼을 뺏는 자는 그 불의함이 말이나 소를 훔친 자보다 더 심하다. 이러한 것에 대해서는 천하의 군자들이 모두 그것의 옳지 못함을 알고 그것을 비난하고 그것을 불의라고 부른다."
그러나 열 명, 백 명을 살인하는 것이 아니라, 수만 명을 살인하는 전쟁에 대해서는 비난할 줄 모르고 그것을 칭송하고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고 있다. 묵자는 바로 이것을 개탄합니다. 그 집단적 허위의식에 대하여 묵자는 나중에 언급하겠습니다만 소염편(所染篇)에서 국가도 물드는 것이라는 논리로 비판합니다.
  
至殺人也 罪益厚於竊其桃李 殺一人謂之不義
今至大爲攻國 則弗知非 從而譽之謂之義
此可謂知義與不義之別乎?(非攻)


罪益厚(죄익후) : 죄가 더 크다.
弗知非(불지비) : 잘못인 줄을 모른다.
義與不義之別(의여불의지별) : 의와 불의의 차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복숭아를 훔치는 것보다 죄가 더 무겁다. (그래서) 한 사람을 죽이면 그것을 불의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크게 나라를 공격하면 그 그릇됨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칭송하면서 그것을 의로움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의와 불의의 분별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관념체계에 대하여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국시대는 이름 그대로 하루도 전쟁이 그치지 않는 시대였습니다. 묵자는 전쟁의 모든 희생을 최종적으로 짊어질 수밖에 없는 기층민중의 대변자답게 전쟁에 대해서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그것을 정면에서 반대합니다. 전쟁은 수천 수만의 사람을 살인하는 행위이며, 수많은 사람의 생업을 빼앗고, 불행의 구렁으로 떨어트리는 최대의 죄악일 뿐입니다. 단 한 줌의 의로움도 있을 수 없는 것이 전쟁입니다. 따라서 비공(非攻) 즉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사상이지요. 그런 점에서 반전평화론이야 말로 전국시대의 최고의 사상이며 도리(道理)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통일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전쟁을 용인하는 한 그것이 어떠한 논리로 치장하고 있든 상관없이 그것은 기만(欺滿)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今萬乘之國虛數於千 不勝而入 廣衍數於萬 不勝而辟 然則土地者所有餘也 王民者所不足也 今盡王民之死 嚴上下之患 以爭虛城  則是棄所不足 而重所有餘也 爲政若此 非國之務者也(非攻)

乘(승) : 戰車를 의미한다. 동시에 나라의 크기를 나타내는 단위로 쓰인다.‘손자병법’ 작전편에 의하면 1승은 말4필, 射手1, 槍兵1, 馬夫1 그리고 보병으로 구성된다. 보병의 수는 춘추시대에는 10명, 전국시대에는 1백명이 전차 1대에 배치된다.
虛(허) : 虛城. 비어 있는 성.
辟(벽) : 다스리다.
棄所不足(기소부족) : 부족한 것을 버리다.
國之務者(국지무자): 국가가 할 일.

“이제 만승의 나라가 수천의 빈 성을 빼앗았다면 그 수천 개의 성 모두에 입성하기 어려울 것이며, 수 만리에 달하는 넓은 땅을 빼앗았다면 그 넓은 땅을 모두 다스리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처럼 땅은 남아돌고 백성은 부족한 것이다.

이제 백성들의 생명을 바치고, 모든 사람들을 도탄에 빠트리면서 하는 일이 고작 빈 성을 뺏는 것이라면

 이 것이야말로 부족한 것을 버리고 남아도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정치가 이러하다면 그것은 국가가 할 일이 아닌 것이다.”
묵자의 반전론은 매우 정연한 논리를 가지고 전개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단한 설득력을 갖습니다. 묵자는 공전(攻戰)을 예찬하는 자를 반박합니다. 공전이 비록 불의(不義)하지만 이익(利益)이 된다는 논리에 대하여도 반박합니다.
제(齊)나라와 진(晋)나라가 처음에는 작은 제후국이었으나 전쟁을 통하여 영토가 확장되고 백성이 많은 강대국으로 발전하였다는 사실을 들어 공전을 예찬하는 논리에 대하여 묵자는 단호하게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논박합니다.

 만(萬)명에게 약을 써서 3, 4명만 효험을 보았다면 그는 양의(良醫)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약이 아니다. 그러한 약을 부모님께 드리겠는가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몇 개의 전승국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수많은 패전국가의 비극과 파괴를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전쟁은 인명과 재산의 엄청난 파괴에 다름 아닌 것이지요. 묵자는 전쟁의 파괴적 측면에 대하여 매우 자세하게 예시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수년, 빨라야 수개월이 걸린다. 임금은 나라 일을 돌볼 수 없고 관리는 자기의 소임을 다할 수 없다. 겨울과 여름에는 군사를 일으킬 수 없고 꼭 농사철인 봄과 가을에 벌인다. 농부들은 씨뿌리고 거둘 겨를이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국가는 백성을 잃고 백성은 할 일을 잃는 것이다. 화살, 깃발, 장막, 수레, 창칼이 부서지고, 소와 말이 죽으며, 진격시와 퇴각시에 수많은 사상자를 내게 된다. 죽은 귀신들은 가족까지 잃게 되고 죽어서도 제사를 받을 수 없어 원귀가 되어 온 산천을 떠돈다. 전쟁에 드는 비용을 치국(治國)에 사용한다면 그 공(功)은 몇 배가 될 것이다.

묵자에게 있어서 전쟁은

국가가 근본을 잃게 되는 것이며 백성들이 그 생업을 바꾸어야 하는 일입니다.
(
國家失本 而百姓易務也)

천하에 엄청난 해악을 끼치는 일입니다.(
天下之害厚矣)

전쟁의 폐단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임금이나 대신들이 그런 짓을 즐겨 행한다면 이것은 천하의 만백성을 해치고 죽이는 것을 즐기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라는 것이 묵자의 비공의 논리입니다.(
王公大人樂而行之 則此樂賊滅天下之萬民也)

그러나 우리들의 전쟁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에 대하여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전쟁관에 앞서서 소비가 미덕이라는 자본주의의 논리부터 생각해보야야 합니다. ‘묵자’의 반전 평화론은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물들어있는가를 돌이켜보는 계기가 됩니다.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이 곧 제(齊)나라와 진(秦)나라가 추구했던 부국강병의 과정을 반복한 것이 사실이지요. 전쟁으로 인한 엄청난 파괴와 처참한 죽음이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를 살리는 자본축적의 돌파구가 되어 왔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1929년의 세계공황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케인즈적 처방의 덕분이 아니라 2차대전이라는 전시경제(戰時經濟)의 덕분이었다는 것이지요. 2차대전의 엄청난 파괴가 최대의 은인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입니다. 마치 소비가 미덕이듯이 전쟁이 미덕이 되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체제입니다. 자본주의 발전과정은 제국주의적 팽창과정이었으며, 체제적 모순을 해소하는 방식이 냉전(冷戰)이든 열전(熱戰)이든 항상 전쟁방식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대체로 10년 주기로 경제공황이 반복되었으며 대규모 전쟁 역시 10년을 주기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전쟁사(戰爭史)가 그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지요.

 묵자의 비공편이 갖는 의미는 전쟁에 관한 허위의식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시대에 만연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허위의식을 다시 한 번 반성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그 현재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묵자는 비공편의 결론으로서 대국이 소국을 공격하면 힘을 합하여 소국을 구하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제후국들이 서로 교상리(交相利)의 평화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평화구조를 만들어내야만 전쟁의 파괴를 막고, 신의와 명성을 얻고, 천하에 끼치는 엄청난 이익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전쟁발발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이 곧 국가간의 교상리의 구조라는 것이지요.

 풍우란(憑友蘭)은 묵가사상은 하층계급과 무사계층의 직업적 사회윤리(社會倫理)를 이론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묵가는 무사(武士)출신의 훈련된 군사적 집단이며, 묵자는 초대 거자(鉅子)이며, 거자는 생살권(生殺權)이라는 군권(軍權)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습니다.

 물론 묵가에는 엄격한 조직규율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말은 믿을 수 있고, 그 행동은 반드시 결과가 있으며, 한 번 승낙하면 반드시 성실하게 이행하고,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사람들의 어려움을 덜기 위해 뛰어드는 것이 묵가들의 조직규율입니다. (其言必信 其行必果 其諾必誠 不愛其軀 赴士之厄困)
묵가에게는 무사집단의 윤리 또는 유협(遊俠)의 의리(義理)가 계승되고 있는 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에서 묵가는 이들과 구별됩니다. 공격전쟁 즉 공전(攻戰)을 철처하게 반대한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공수편(公輸篇)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공수반(公輸盤)이라는 명장(名匠)이 초왕(楚王)에게 초빙되어 운제(雲梯)라는 공성기구(攻城機具)를 제작하였습니다. 초나라는 그것을 이용하여 송(宋)을 공격하려 하였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묵자가 제나라를 출발하여 열흘 낮 열흘 밤을 달려가서 초나라로 하여금 전쟁을 단념하게 합니다. 이 공수편에는 묵자와 공수반과 초왕이 벌이는 광경이 소설적 구도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반전논리도 돋보이지만 전쟁을 막기 위한 묵자의 성실한 태도가 더욱 감동적입니다.
묵자가 반전논리로 초나라의 침략의도를 저지할 수 없게 되자 초나라의 공격이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단언합니다. 결국 묵자와 공수반의 도상전쟁(圖上戰爭)이 연출됩니다. 일종의 모의전쟁(模擬戰爭)입니다. 허리띠를 끌러 성을 만들고 나무조각으로 기계를 만들었습니다.

 공수반이 공성방법을 바꾸어 아홉 번이나 성을 공격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묵자에게는 아직도 방어술이 여유가 있었습니다. 공방시범에서 공수반은 패배를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내게는 선생을 이기는 방법이 있으나 이 자리에서 밝힐 수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초왕이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그 물음에 대한 답변은 공수반이 아니라 묵자가 하였지요. “공수반은 나를 이 자리에서 죽이면 송나라를 공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저의 제자들은 금활리(禽滑釐) 이하 3백 명이 이미 저의 방성기구를 가지고 송나라의 성 위에서 초나라 군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록 저를 죽인다 하더라도 이길 수 없습니다.”

 결국 초나라의 송나라 침략을 저지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만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그 뒤에 이어집니다. 묵자가 돌아가는 길에 송나라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마침 비가 내려서 묵자는 마을 여각(閭閣)아래로 들어가 비를 피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지기는 묵자를 들이지 않았습니다. 송나라를 위하여 열흘 밤낮을 달려가 초나라의 침략을 저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지 못하고 그를 박대하였습니다. 공수편 마지막에는 첨부되어 있는 다음 구절이 그것입니다.

止楚攻宋  止楚攻鄭  阻齊罰魯  墨子過宋天雨庇其閭中  守閭者不內也  故治於神者衆人不知其功  爭於明者衆人知之. (公輸)

內(납) : 맞아들이다. 納.
治於神者(치어신자) : 일을 처리함에 뛰어난 사람.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사람.
爭於明者(쟁어명자) : 싸움에 밝은 사람.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저지하였고, 초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저지하였으며,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막았다. 묵자가 송나라를 지날 때 비가 내려서 마을 여각(閭閣)에서 비를 피하려 하였다. 그러나 문지기가 그를 들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드러내놓고 다투는 사람은 알아준다.”

미리 아궁이를 고치고 굴뚝을 세워 화재를 예방한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우면서 요란하게 불을 끈 사람은 그 공을 칭찬하는 것이 세상의 인심인 셈이지요. 개선장군에 대한 환호가 그러한 것입니다.
나는 매스컴으로부터 오래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묵자의 표현을 따른다면 덜 물들었다고 생각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부끄러운 경험을 멀리 우크라이나에서 하게 됩니다.

 키예프에는 전승기념탑이 있습니다. 2차대전의 승리를 기념하는 탑입니다. 나는 그 탑을 보면서도 그것이 전승기념탑인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나의 뇌리에 전승기념탑은 미국 해병대 병사들이 점령고지에 성조기를 세우는 형상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지요. 키예프의 전승기녑탑은 언덕 위에 팔 벌이고 서 있는 모상(母像)이었습니다. 내가 의아해 하자 안내자가 설명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였다는 것은 전쟁터에서 아들이 죽지 않고 돌아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돌아오는 아들을 맞으러 언덕에 서 있는 어머니의 상(像)이 바로 그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나의 뇌리에 자리잡고 있는 전쟁과 승리에 대한 생각이 천박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묵자가 반전평화론을 전개하면서 부딪친 가장 힘든 장애는 당시 만연하고 있던 사회적 관념이었습니다. 부국강병의 가장 확실한 방법이 전쟁이라는 패권시대의 관념이 최대의 장애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전쟁이란 국위를 선양하고 백성들의 신임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며, 전쟁이란 비록 의(義)로운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이(利)로운 것이라는 지배계층의 사고가 피지배계층의 의식에까지 깊숙이 침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전쟁이 상시화되어 있는 사회의 전쟁 불감증(不感症)까지 감안한다면 묵자의 고충이 어떠하였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러한 묵자의 고민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 소염론(所染論)입니다.

子墨子見染絲者 而歎曰 染於蒼則蒼 染於黃則黃 所入者變 其色亦變  五入必而已則 其五色矣 故染不可不愼也 非獨染絲然也 國亦有染.

천자문에 ‘묵비사염(墨悲絲染)’이란 구절이 있습니다. 묵자가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탄식하였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구절이 원전입니다. 바로 묵자의 소염론(所染論)입니다.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묵자가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하였다.파란 물감에 물들이면 파랗게 되고 노란 물감에 물들이면 노랗게 된다. 넣는 물감이 변하면 그 색도 변한다. 다섯 가지 물감을 넣으면 다섯 가지 색깔이 된다. 그러므로 물드는 것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단 실이 물드는 것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라도 물드는 것이다.”

 “나라도 물드는 것이다.” 이것이 아마 묵자가 가장 절실하게 고민했던 문제였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인간의 행동은 욕구로부터 나오며(窮知而顯於欲也) 욕구는 후천적으로 물들여지는 것(所染)이라고 주장합니다. 백지와 같은 마음이 ‘마땅하게 물들여져야’(染當) 도리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도 물든다는 것은 곧 묵자의 사회문화론이 됩니다. 물건을 많이 소비하는 것을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전쟁으로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도 역시 나라가 그렇게 물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개술국에서는 맏아들을 낳으면 잡아먹으면서 태어날 동생들에게 좋은 일이라 하고, 할아버지가 죽으면 할머니를 져다 버리면서 귀신의 아내와 함께 살 수 없다고 한다는 것이지요. 담인국에서는 부모가 죽으면 시체의 살을 발라내고 뼈만 묻어야 효자라 한다는 것을 그 예로 들고 있습니다.

 소염론은 묵자의 학습론과 문화론의 기초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오늘날에 묵자가 나타난다면 나는 묵자가 여전히 탄식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물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크게 탄식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애(兼愛)와 비공(非攻)을 중심으로 ‘묵자’를 읽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반드시 읽어야 할 편들이 더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절용편(節用篇)입니다. 절용은 물건을 아껴 쓰는 검소함입니다. 절용은 밖에서 땅을 뺏어서 나라의 부(富)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비용을 줄여서 두 배로 늘리는 것입니다. 재물의 사용에 낭비가 없게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묵자의 사과론(辭過篇)입니다. 과소비(過消費)를 없애는 것이지요.
  
“옛날의 성왕은 궁실을 지을 때 단지 생활의 편의를 고려하였을 뿐 결코 보고 즐기기 위하여 짓는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궁실을 짓는 법은 이롭지 않는 것에는 비용과 노력은 들이지 않는 것이다.”(聖王作爲宮室 便於生 不以爲觀樂也. 故爲宮室之法曰 凡費財勞力不加利者 不爲也 : 辭過)
  
“쓸데없는 비용을 없애는 것은 성왕의 도이며 천하의 큰 이익이다.”(去無用之 聖王之道 天下之大利也)
  
묵자가 무용(無用)한 것으로 드는 것 중에는 창칼을 비롯하여 궁궐 옷 음식 수레 배 장례 음악 등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묵자의 절용(節用)은 비공(非攻) 비악(非樂) 절장(節葬)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순자(荀子)는 묵자를 비판하여 ‘실용(實用)에 눈이 가려 문화(文化)를 모른다’(墨子蔽於用 而不知文) 즉 문화라는 소비가 생산을 증대시킨다는 반론을 폈던 것이지요. 절용이 미덕이다. 아니다.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 과소비를 삼가자는 캠페인을 벌이다가 다시 경기활성화를 위해서 소비를 늘려야 한다는 반대의 목소리에 가려지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체제하의 생산과 소비는 사람들의 삶을 기준으로 하여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사실 그 많은 음식점이 불황을 겪지 않으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외식을 해야 하는지 걱정됩니다. 마찬가지로 10개의 월드컵 경기장을 계속 채우려면 얼마나 많은 경기와 문화행사를 만들어내야 할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입장해야 할지. 생각하면 아득한 마음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경우든 사람들의 소용(所用)은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자본의 현재형태인 현재의 생산규모를 유휴화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차라리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새로운 상품이나 새로운 소재, 새로운 기술, 새로운 문화가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소용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최대한의 이윤을 얻기 위한 자본운동의 일환일 뿐입니다.

 묵자의 절용(節用)이 과연 문화를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가 인간적인 것이 아닌지에 대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소용없는 물건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느냐라는 일견 인간적인 논리로 그것의 생산과 소비를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먹고 사는 구조를 어떻게 짜는 것이 온당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하여야 하는 것이지요. 기업의 논리, 경쟁의 논리, 효율성의 논리에 의해서 생산규모와 소비수준이 설정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진보는 단순화라는 간디의 명제를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묵자의 절용편(節用篇)은 소염론(所染論), 사과론(辭過論)과 함께 과잉생산과 대량소비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 현대자본주의의 거대한 낭비구조를 조명하는 유력한 관점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낭비구조와 함께 거대한 소염구조(所染構造)도 함께 주목해야 하는 것이지요.

묵가를 설명하면서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묵자사상의 철학적 방법론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묵가의 강력한 조직(組織)과 실천(實踐)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묵가의 철학적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는 삼표(三表)의 원문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삼표란 세 가지 표준(標準)이란 의미입니다. 판단에는 표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표준이 없는 것은 마치 녹로(轆轤)위에서 동서(東西)를 헤아리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지요.
어떤 것이 이로운 것인지 어떤 것이 해로운 것인지, 그리고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 것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표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삼표론(三表論)은 이를테면 인식(認識)과 판단(判斷)의 준거(準據)에 관한 논의입니다.

 묵가가 제자백가 중에서 현학(顯學)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논리적 정합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묵자는 윤리적 차원의 주장에 그치지 않고 그를 뒷받침하는 논리적 구조, 또는 철학적 사유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 잠시라도 언급이 필요한 부분이기는 합니다만 이러한 철학적 사유를 내장하고 있는 것과 함께, 밖으로는 종교적인 가치를 천명해두고 있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묵자의 천지론(天志論)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이 필요합니다.

 묵자는 우리의 사유는 사실판단(知)의 기초 위에서 가치판단(意)을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사실판단의 기초가 되는 지각과 경험이 없으면 그 주장이 망상에 빠지게 되고, 또 가치판단이 없는 지각과 경험만으로는 사실을 일컬을 수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감각을 기초로 하는 감성적 인식이 없으면 이성적 인식이 없다는 것이지요. 이성적 인식(意)은 감성적 인식(知)에 의존(依存)하고 감성적 인식은 이성적 인식으로 발전(發展)한다는 논리입니다. 지(知)와 의(意)가 통일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항상 판단의 표준을 세우지 않으면 가치판단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묵자의 주장이며 삼표가 바로 판단의 표준입니다.
   
何謂三表...有本之者 有原之者 有用之者 於何本之 上本於古者聖王之事 於何原之 下原察 百姓耳目之實 於何用之 發以爲刑政 觀其中國家百姓人民之利 此所謂言有三表也(非命 上)

表(표) : 표준(標準). 本(본) : 역사적 검증.
原(원) : 사실과 현실. 用(용) : 실천과 실용.

“무엇을 삼표라고 하는가. --- 본(本), 원(原), 용(用)이 그것이다. 어디에다 본(本)을 둘 것인가? 위로 옛 성왕의 일에 본을 두어야 한다. 어디에다 원(原)을 둘 것인가? 아래로 백성들의 이목이라는 현실에 원을 두어야 한다. 어디에다 용(用)을 둘 것인가? 나라의 법과 행정을 시행(發)하여 그것이 국가, 백성, 인민의 이익에 합치하는가를 보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소위 판단(言)의 세 가지 표준이라고 하는 것이다.”

 묵자의 삼표는 첫째는 역사적 경험이며 둘째는 현실성이며, 셋째는 민주성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의 표준인 용(用) 즉 국가백성인민의 이익에 대하여 묵자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부(富) 상(象) 안(安) 치(治)가 그것입니다.
부(富)는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만 묵자의 경우 풍요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상(象)은 인구를 늘리는 것입니다. 안(安)은 삶의 안정성입니다. 그리고 치(治)는 평화입니다. 어느 것이나 묵자사상이 담겨 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가 주장하고 있는 겸애(兼愛) 비공(非攻) 절용(節用) 사과(辭過)의 내용과 같습니다. 한 마디로 묵자에게 있어서 판단의 표준은 묵자의 사회정치적 입장(立場)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묵자의 입장은 기층민중의 이익입니다. 그리고 기층민중의 이익은 전쟁을 반대하고 서로 사랑하고 나누는 것(交利)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나가는 것입니다. 묵자에게 있어서 그의 사상의 핵심은 겸애와 교리이며 이 겸애와 교리가 당대의 사회적 조건에서 반전(反戰) 평화(平和) 절용(節用)이라는 실천적 과제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제자백가 중 어떠한 학파의 사상보다 관계론(關係論)에 철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전(攻戰)은 별애(別愛)와 마찬가지로 존재론적 패러다임입니다. 자기의 존재를 배타적으로 강화하려는 것입니다. 전쟁과 병합의 밑바탕에는 바로 이 존재론적 원리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묵자는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존재론적 패러다임이 불식되지 않는 한 사회적 혼란은 불가피한 것이지요. 자기의 국(國)만을 생각하고, 자기의 가(家)만을 생각하고, 자기의 몸(身)만을 생각하는 것이지요. 사회는 무도(無道)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묵자의 도(道) 역시 근본에 있어서는 관계(關係)입니다. 묵자는 결코 일방적인 사랑이나 희생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맺고 있는 상호관계를 강조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관계의 본질이라고 주장합니다.
겸애와 함께 교리(交利)를 주장하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관계의 본질을 상생(相生)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나아가서 묵자는 겸애와 교리를 하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묵자의 천지론(天志論)입니다.

 그러나 많은 연구자들은 묵자의 천(天)은 인격천(人格天)이나 절대적 천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묵자의 천지론(天志論)은 사람들로 하여금 겸애(兼愛)의 도를 실행하게 하기 위한 장치(裝置)라는 것입니다. 묵자에게 있어서 천지(天志)와 명귀(明鬼)는 종교적, 정치적 제재장치(制裁裝置)라는 것입니다. 명귀(明鬼)는 천지(天志)가 올바르게 관철되는가를 감시하고 그에 따라 화복(禍福)을 내리는 역할을 합니다. 묵자의 하느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현세(現世)와 인간세계(人間世界)를 벗어나지 않고 있는 것도 그렇습니다. 묵자의 천지론이 전체 체계에 있어서 그러한 역할을 떠맡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묵자는 바로 이 삼표론에서 천(天)이 단순한 기능적(機能的) 천(天)이 아님을 천명합니다. 위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천(天)은 도(道)와 마찬가지로 진리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겸상애(兼相愛)와 교상리(交相利)가 하늘의 뜻이라는 주장은 그것이 세계의 본질적 구조라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묵자는 바로 이러한 천지(天志)가 표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이외의 어떤 것도 표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묵자의 비명사상(非命思想)입니다. 이 삼표론 역시 비명편(非命篇)에 있는 것이지요. 비명(非命)이란 하늘이 정한 운명과 숙명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화복(禍福)은 인간이 자초하는 것이며 결코 하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명귀가 내리는 것이 아니지요. 묵자는 상(商)나라와 하(夏)나라의 시(詩)를 인용하여 “천명(天命))이란 폭군이 만들어 낸 것이다(命者暴王作之)”라고 하고 있습니다. 폭군이 자의적인 횡포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것이 천명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묵자의 천(天)은 인격천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노자의 도(道)와 같은 진리(眞理)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뜻이 상애상리(相愛相利)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도우라는 것이 곧 하늘의 뜻이라는 형식으로 그의 사상을 개진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늘의 뜻을 따라 겸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모두가 하느님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도우기를 바라는 것이다. 부모 학자 임금은 법이 될 수 없다.”(
莫若法天以其兼而愛之
人無貧富貴賤 皆天之臣也 是以天欲人相愛相利也. 父母學者君 三者莫可以爲法 : 法儀
)
  
하늘 이외의 존재 즉 부모(父母), 학자(學者), 군주(君主)는 법(法)이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부모는 자기 자식을 남의 자식보다 더 사랑하며, 학자는 하느님보다 지혜로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학자의 지식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죽은 관념에 불과하고 그나마 독선적이고 배타적이어서 평등한 사랑을 배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군주(君主)란 인민의 의(義)를 하느님의 뜻과 화동일치(和同一致)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 수단일 뿐 그 자신이 가치의 표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묵자의 주장입니다.
  
여러분은 묵자의 사상체계가 매우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묵자’의 모든 내용은 묵자의 사회적 입장과 튼튼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묵자의 하느님 사상까지도 묵자의 전체체계의 일환으로 배치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민국초기 사회운동 과정에서 이러한 묵자의 천지론을 종교적이라고 단정한 좌파의 비판은 결과적으로 매우 교조적인 해석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묵가의 조직과 실천의 엄정함에 관한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여씨춘추’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입니다. BC 381년 양성군(陽城君)의 부탁을 받고 초(楚)나라의 공격에 대항하였으나 패하였다. 거자(鉅子) 맹승(孟勝) 이하 1백83명이 성(城) 위에 누워 자살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묵가(墨家)는 집단자살이라는 매우 비장한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거자(鉅子)는 묵가조직의 책임자로서 생사여탈권을 가질 정도로 조직규율이 엄격하기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묵자가 물론 초대 거자였음은 물론입니다.

 맹승은 초나라의 양성군의 부탁으로 나라의 수비를 맡고 있었습니다. 패옥(佩玉)을 둘로 나누어 신표(信標)로 삼을 정도로 신의가 두터웠습니다. BC 381년 초나라의 왕이 죽고 내란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양성군은 왕실에 도전했다가 달아납니다. 초 왕실은 양성군의 봉지(封地)를 몰수하기 위해 군사를 보냈습니다. 수비를 맡고 있던 맹승은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왕실의 공격을 막을 힘도 없고 그렇다고 신의를 저버릴 수도 없다. 죽음으로써 신의를 지킬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최후의 선언을 합니다.

 이러한 맹승의 결연한 자세에 대하여 제자들이 불가함을 간합니다. 자결이 양성군에게 이롭다면 죽는 것이 마땅할 것이지만 그것이 양성군에게 조금도 이로울 것이 없을 뿐 아니라 더구나 그것은 세상에서 묵자의 명맥을 끊는 일이기 때문에 불가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반론에 대하여 맹승이 펼치는 논리가 묵가의 면목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양성군에 대한 나의 관계는 스승이기 이전에 벗이었고, 벗이기 이전에 신하였다. 우리가 죽기를 마다한다면 앞으로 세상 사람들이 엄격한 스승을 구할 때 묵자학파는 반드시 제외될 것이며, 좋은 벗을 구할 때에도 묵자학파는 제외될 것이며, 좋은 신하를 구할 때도 반드시 묵자학파가 제외될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택하는 것은 묵자학파의 대의(大義)를 실천하고 그 업(業)을 계승하기 위한 것이다.”
  
결연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맹승은 송나라에 가 있는 전양자(田襄子)에게 거자(鉅子)를 넘기고 자결했습니다. 그를 따라 함께 자결한 제자가 1백83명이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 이외에도 묵가의 엄격한 규율에 대하여 전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묵자 다음의 거자인 복돈(腹敦)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복돈의 아들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진(秦)의 혜왕(惠王)이 복돈에게 은혜를 베풉니다. “선생은 나이도 많고 또 다른 아들이 없으시니 과인이 이미 형리에게 아들을 처형하지 말도록 조처를 취했습니다. 선생께서는 이런 제 뜻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복돈의 대답은 참으로 뜻밖이었습니다.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남을 해친 자는 형벌을 받는 것이 묵가의 법입니다. 이는 사람을 죽이거나 해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무릇 사람을 죽이거나 해치는 행위를 금하는 것은 천하의 대의입니다. 왕께서 비록 제 자식을 사면하셔서 처형하지 않도록 하셨더라도 저로서는 묵자의 법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돈은 혜왕의 사면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식을 처형했습니다.

묵가에 대하여는 맹자가 가장 신랄한 비판을 가합니다. 맹자는 물론 맹자편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묵가만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아닙니다만 주로 묵가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자기이론의 정체성을 확립해 갑니다. 맹자는 묵가의 엄격하고 비타협적인 면을 비판합니다. 그리고 겸애라는 엄숙주의에 대해서도 그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에 어긋나는 것임을 비판합니다.
  
'맹자'에 맹자와 제자 도응(桃應)의 대화가 있습니다.

도응이 질문하였습니다. "순(舜)이 천자로 있고 고요(皐陶)가 사법관으로 있는데 천자의 부친인 고수(瞽瞍)가 살인을 하였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필 순임금과 그 아버지 고수를 예로 든 것은 부자간의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했었기 때문이지요. 이 질문에 대한 맹자의 답변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고수는 당연히 법에 따라 체포되어야 하고, 그리고 살인자를 사형에 처하는 것은 선왕의 법이기 때문에 순임금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맹자의 답변입니다. 그러면 순임금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맹자의 대답이 압권입니다. 이 답변이 유가와 묵가의 차이를 확연하게 드러내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순은 임금자리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몰래 부친을 업고 도망가서 멀리 바닷가에 숨어살면서 부친을 봉양하면서 천하를 잊고 즐거운 마음으로 여생을 보내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맹자의 대답입니다. 임금의 사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들을 처단한 묵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방식은 효(孝)라는 이름으로 별애(別愛)를 두호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논어'에도 유가와 묵가의 차이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섭공(葉公)과 공자의 대화입니다.

 섭공이 공자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고을에 대쪽같이 곧은 사람(直躬)이 있습니다. 그 아비가 양을 훔치자 그가 그 사실을 관청에 고발했습니다." 공자가 말했습니다. "우리 고을의 곧은 사람은 그와 다릅니다. (비록 그런 일이 있더라도) 아비는 자식을 위해 감추어주고 자식은 아비를 감추어줍니다. 곧음은 그 가운데 있습니다."
  
강의실에서 이야기하기는 좀 적절하지 않습니다만 선생이 학생을 편애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인정(人情)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자식도 편애하는 것이 인정이라는 것이지요. 사랑은 본질적으로 편애이며 편애하지 말라는 것은 사랑도 모르는 소리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소위 인정(人情)이라는 심성 역시 사회적으로 물든 것이고 역사적으로 물든 것이라는 인식이 묵자에게는 있는 것이지요. 묵자의 주장이 비현실적인 면이 있었던 점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모든 현실정합적인 주장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한계도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문제와 함께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묵가의 소멸이 묵가이론의 비현실성과 엄숙주의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위에서 지적하였듯이 묵가의 사회적 토대가 소멸함에 따른 것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끝으로 묵자에 대한 '장자(莊子)'의 평가를 소개합니다.
  
"실천행위는 과도하였으며 절제는 지나치게 엄정하였다. '非樂'과 '節用'을 저술하였다. 사람이 태어나도 찬가를 부르지 않았으며 죽어도 상복을 입지 않았다. 묵자는 만인의 사랑과 만인들간의 이익을 말하고 서로의 투쟁을 반대하였으니 그는 실로 분노하지 말 것을 설파한 것이다.
  
노래하고 싶을 때 노래하지 말고, 울고 싶을 때 울지 말고, 즐거울 때 즐거워하지 말아야 한다면 이런 묵가의 절제는 과연 인간의 본성과 맞는 것인가? 묵가의 원칙은 너무나 각박하다. 세상을 다스리는 왕도(王道)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묵자와 금활리(禽滑釐)의 뜻은 좋지만 실천은 잘못된 것이다. 스스로 고행(苦行)을 하게 하여 종아리에 살이 없고 정강이에 터럭이 없는 것으로 서로 경쟁을 벌이게 할 뿐이다. 사회를 어지럽히기에는 최상이요 다스리기에는 최하이다.

묵자는 천하에 참으로 좋은 인물이다. 이런 사람을 얻으려 해도 얻을 수 없다. 자기의 생활이 아무리 마른 나무처럼 되어도 자기의 주장을 버리지 않으니 이는 정말 구세(救世)의 재사(才士)라 하겠다."

 묵가(墨家)는 중국의 사상사에서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최초의 좌파조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국시대의 패권적 질서와 지배계층의 사상에 대하여 강력한 비판세력으로 등장하여 기층민중의 이상(理想)을 처음으로 그렸습니다.
투철한 신념과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대중 속에서 설교하고, 검소한 모범을 보였으며 서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묵자가 죽은 후에도 2백여년 동안 여전히 세력을 떨쳤었지만 그 후 2천년이라는 긴 망각의 시대를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묵가(墨家)는 좌파사상과 좌파운동이 그 이후 장구한 역사 속에서 겪어나갈 파란만장한 드라마를 역사의 초기에 미리 보여주었다는 아이러니컬한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영복/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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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4.08.27 -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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