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인성호 三人成虎
[석 삼/사람 인/이룰 성/범 호]

☞세 사람이 호랑이를 이루다. 거짓도 반복하면 진실이 된다.
세 사람이 똑같이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말하면 호랑이가 나타난 것으로 믿게 된다. /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면 무슨 일이나 다 할 수 있다. / 여러 사람이 떠들면 소문 낸 것이 무섭다.

[준] 시호(市虎).
[동] 시유호(市有虎), 시호삼전(市虎三傳), 삼인언이성호(三人言而成虎). 三人成市虎
[유] 증삼살인(曾參殺人), 십작목무부전(十斫 木無不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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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韓非子』〈內儲設〉,『戰國策』〈魏策 惠王〉
[내용]전국 시대, 위(魏:梁)나라 혜왕(惠王) 때의 일이다. 태자와 중신 방총(龐 )이 볼모[人質]로서 조(趙)나라의 도읍 한단(邯鄲)으로 가게 되었다. 출발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방총이 심각한 얼굴로 혜왕에게 이렇게 물었다.

"전하, 지금 누가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전하께서는 믿으시겠나이까?"
"누가 그런 말을 믿겠소."

"하오면, 두 사람이 똑같이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어찌하시겠나이까?"
"역시 믿지 않을 것이오."

"만약, 세 사람이 똑같이 아뢴다면 그땐 믿으시겠나이까?"
"그땐 믿을 것이오."

"전하,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명백한 사실이옵니다. 하오나 세 사람이 똑같이 아뢴다면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난 것이 되옵니다. 신은 이제 한단으로 가게 되었사온데, 한단은 위나라에서 저잣거리보다 억만 배나 멀리 떨어져 있사옵니다. 게다가 신이 떠난 뒤 신에 대해서 참언(讒言)을 하는 자가 세 사람만은 아닐 것이옵니다. 전하, 바라옵건대 그들의 헛된 말을 귀담아 듣지 마시오소서."

"염려 마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과인은 두 눈으로 본 것이 아니면 믿지 않을 것이오."

 그런데 방총이 한단으로 떠나나자마자 혜왕에게 참언을 하는 자가 있었다. 수년 후 볼모에서 풀려난 태자는 귀국했으나 혜왕에게 의심을 받은 방총은 끝내 귀국할 수 없었다고 한다.

[참고] 증삼살인(曾參殺人)-- 孔子의 제자 증삼(曾參)의 어머니가 아들을 의심치 않았는데 베를 짜고 있 을 때 어떤 사람이 와 증삼이 사람을 죽였다고 고함을 쳤다. 처음엔 믿지 않았으나 세 번째 사람이 와서 같은 말을 하자 그 말을 믿고 베를 짜다가 북을 던져 버리고 뛰어나갔다.

[속담] 세 사람이 우겨대면 호랑이도 만들어낼 수 있다. /입이 여럿이면 金도 녹인다. /열번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예문1]여러 사람들이 함께 말을 만들어 내면 물에 가라앉아야할 돌이 떠다니게 되고, 떠 있어야 할 나무는 가라앉게 된다. 또한 곧은 것도 굽은 것으로 만듥, 흰 것도 검은 것으로 만든다.『신어新語』 

[예문2]영어 자막과 함께 한글 번역을 하고 있는 이 동영상에는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다음엔 의심받지만 되풀이되면 진실이라고 믿는다"며 김연아에 대한 근거 없는 내용의 확산을 경계했다. <2010.4.13 TV리포트>

■ 삼재 三才
[석 삼/재주 재]

☞만물을 지배하는 세 가지. 天, 地, 人.
[참고]동서양을 막론하고 ‘3’은 완성, 최고, 신성, 장기성, 종합성 따위로 인식되고 있으니, 우리만 3을 중시한다고 볼 수는 없다. 엔드레스(F. C. Endres)는〈수의 신비와 마법〉에서 3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라이문트 뮐러는 1903년 논문에서 설화와 문학, 그리고 미술에 나타난 3이라는 수의 중요성을 해명하고자 했다. 그는 자연을 유심히 관찰하면 3으로 이루어진 구조를 체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인간은 물과 공기와 흙을 보고 세 가지 형태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고를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인간은 물체의 세 가지 상태(고체·액체·기체)와 피조물의 세 가지 집단(과일·식물·동물)을 발견했다. 인간은 식물에서는 뿌리와 줄기와 꽃을, 과실에서는 껍질과 과육과 씨앗을 밝혀냈다. 또한 태양은 아침, 정오, 저녁에 각각 다른 모습을 갖는다고 여겼다. 실제로 모든 경험은 길이와 높이와 넓이라는 공간 좌표 안에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는 3차원이다. 일체의 삶은 생성과 존재와 소멸로 표상될 수 있는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이라는 세 국면으로 진행되며, 완전한 전체는 정립과 반정립, 그리고 종합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색채의 혼합은 삼원색인 빨강, 파랑, 노랑에서 비롯한다.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러한 자연현상 속의 3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적이다. 서구의 3개념이 가장 절대적으로 드러난 부분은 역시 삼위일체다. 삼위일체는 초기 기독교시대에 등장, 후에 정립된 완벽의 개념이다. 우리나라의 종교관이 3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과 비교할 때, 그 유사성이 보인다. 우리는 우리들의 싱화에 담겨진 3의 의미를 지나치게 간과해왔다. 우리 민족의 탄생신화에서 조차 녹아 있는 3은 가장 환상적인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민족신화에 3이 매우 중요했음을 암시한다.

 단군신화에서 삼위태백, 천부인 3개, 무리 3000명, 풍백·우사·운사, 360여 가지 일, 삼칠일간의 금기 모조리3이다. 실상 환인, 환웅, 단군의‘3대(三代)’로 이루어지는 ‘삼신(三神)’체계가 고대신화의 원형을 이룬다. 임재해 교수(안동대)는 그의 저서〈민족신화와 건국 영웅들〉에서 단군신화의 인간상을 셋으로 나눈다. 신격으로서의 황웅, 동물격인 곰녀, 그리고 인격인 단군이 3의 원형체계라는 것이다. 해모수가 동명왕으로 이어지고, 동명왕이 유리왕으로 이어지는 고대 부여족의 신화적 중심인물도‘3대’이기는 마찬가지다.

중국에서도 3이 두루 쓰였다. 중국 청동기문화의 대표적인 제사도구들을 대개 세 개의 다리로 되어 있으니 제기(祭器)를 뜻하는 정(鼎)이란 글자도 다리 셋을 형상화한 것이다. 고대 동방의 삼재설(三才說)은 천·지·인 수관념은 그대로 한글 창제원리로도 작용하였다. 홀소리 글자의 기본을 셋으로 정하여‘·’는 하늘,‘?’는 땅,‘?’는 사람이 서 있는 모양을 본떠, 세상은 하늘과 땅, 그 사이에 서 있는 사람으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이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한자문화권에 편입되면서 한문식의 3개념이 강화되었다.‘주자가례’가 강화되면서 귀착된 삼강오륜(三綱五倫),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삼일장(三日葬), 삼배(三拜), 삼탕(三湯), 삼색실과(三色實果)등이 그것이다.

 삼황(三皇), 삼도(三道), 삼족(三族), 삼계(三戒)도 들어온 것들이다. 한자문화권에서는 한자를 풀어서‘一’과 ‘二’를 합한 것을‘三’으로 보았다.‘三’을 거꾸로 세우면‘川(泉)’이 되어 ‘셋’과‘샘’은 어원도 같고 무궁무진함을 뜻하기도 한다. 문자가 생성되던 상고시대부터 3은 늘 완벽의 상징이었다. 불교에서는 조금 어려운 말로 삼성(三性)이라고 하여 일체의 세간법(世間法)을 그 본질 면에서 선(善), 악(惡), 무기(無記)의 셋으로 보는 교설이 있다. 이 삼성의 입장에서 관조된 세계는 공(空:없음)일 뿐만 이니라 진실한 유(有:있음)가 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세상의 있고 없음이 모두 삼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말이다.

 불보(佛寶)·법보(法寶)·승보(僧寶)를 의미하는 삼보(三寶), 삼보에 귀의하는 삼귀의(三歸依), 순수한 집중을 통하여 마음이 고요해지는 상태인 삼매(三昧), 중생들의 세계를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로 나누는 삼계(三界) 등은 모두 불교에서 전래된 것이다. 3은 저 홀로 쓰여지는 것만도 아니다. 3이 3번 반복되어 9를 이루면서 강한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마을굿에서는 서말·서되·서홉으로 쌀을 준비하여 신성의 의미가 한결 강해진다.

 아홉수라고 하여 29살에 결혼을 피하는 관념속에는 이미 '삼재'라고 하는 액이 3번 반복된 마지막 해라는 계산법이 숨겨져 있다. 아기를 낳고 금줄을 치면서 몸조리를 하게 되는 삼칠일(21일간)에도 7이 3번 반복된 의미가 담겨 있다. 삼현육각, 삼정승 육판서 처럼 3과 3의 배수인 6이 결합하여 강조되기도 한다. 무언가 잘못을 하고서 부지런히 도망을 칠 때, 우리는 '삼십육계' 줄행랑을 친다고 말한다. 3이 열두번이나 반복되었으니 대단한 속도감을 뜻한다. 여기서 열두번은 대단히 많다는 속뜻을 지니고 있다. /반복은 좋은 것을 더욱 좋게 만든다.

 우리는 늘 홀수가 두 번 겹친 것을 선호했다. 1월 1일의 설날은 말할 것도 없고, 3월 3일의 삼짇날, 5월 5일의 단오, 7월 7석의 칠석, 9월 9일의 중구절을 중시했다. 어느 누가 2월 2일, 4월 4일, 6월 6일, 8월 8일, 10월 10일을 중시하는가. 3을 양수(陽數)이고 길한 숫자인 탓으로 양수가 겹쳐진 삼월 삼짇날(3.3) 따위를 길일로 친 것도 것도 반복의 원리다. 삼월 삼짇날은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이 풀리며 냇가의 버들 강아지도 눈을 트고 모처럼 기지개를 펴게 되는 길일이다.중국사람들 최대 명절인 9.9절도 바로 3.3이 반복된 결과다. 이날은 양기가 그득하여 천지 만물이 힘을 얻게 된다고 믿어왔다. 3을 좋아하는 수관념은 짝수보다도 홀수를 선호했던 수관념과도 관계있다. 우스갯소리로, 술집에서 맥주를 시킬 때 '1·3·5·7·9’를 고집하는 것도 무의식중에 이러한 수개념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참고]삼재팔난(三災八難) : 불교에서 말하는 삼재와 팔난 / 삼재 : 난리, 기근, 병 (혹은, 수재, 화재, 풍재, 혹은 생년월일에 따른 불길한 운수) / 팔난 : 부처를 볼 수 없고, 불법을 들을 수 없는 여덟가지 곤란한 점, 곧 지옥, 축생, 아귀, 장수천, 귀머거리와 장님, 정토의 변지, 사견, 불전불후 

■ 삼종지도 三從之道
[석 삼/따를 종/어조사 지/이치 도]

세가지 따라야 할 도리, 옛날 여자가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을 가면 남편을 따르며 남편이 죽으면 자식을 따르라는 말

[동]삼종지의(三從之義), 삼종의탁(三從依託), 삼종지덕(三從之德), 삼종지례 (三從之禮), 삼종지법(三從之法)

[출전]《예기》의 의례(儀禮) <상복전(喪服傳)>
[내용]의례에 보면 '부인에게는 세가지 따라야 할 사람이 있으니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된다. 시집가기 전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이미 시집을 갔으면 남편을 따르고 지아비가 죽었으면 아들을 따라야 한다'라고  하여 여자의 삶을 극히 제한하고 있다. 이 삼종지도(三從之道)에 칠거지악(七去之惡)까지를  합하여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사회적 현실을 나타내 준다.

[원문] 婦人有三從之義, 無專用之道, 故未嫁從父, 旣嫁從夫, 夫死從子

■ 삼천지교 三遷之敎
[석 삼/옮길 천/어조사 지/기르칠 교]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뜻으로, 인간의 성장에 있어서 그 환경이 중요함을 가리키는 말.

[동]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맹모삼천(孟母三遷)
[유] 현모지교(賢母之敎), 맹모단기지교(孟母斷機之敎),근주자적(近朱者赤)·근묵자흑(近墨者黑), 귤화위지(橘化爲枳)·남귤북지(南橘北枳), 마중지봉(麻中之蓬)--삼밭의 쑥대  

[출전]列女傳 母儀傳
[내용]맹자(孟子)는 이름이 가(軻)로, 공자가 태어난 곡부(曲阜)에서 멀지 않은 산둥성 추현(鄒縣) 출신이다.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므로 어머니 손에서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현명한 사람으로 아들 교육에 남달리 관심이 많아 단기지교(斷機之敎)의 일화를 남긴 분이다.

맹자가 어머니와 처음 살았던 곳은 공동묘지 근처였다. 놀 만한 벗이 없던 맹자는 늘 보던 것을 따라 곡(哭)을 하는 등 장사지내는 놀이를 하며 놀았다.

 이 광경을 목격한 맹자의 어머니는 안 되겠다 싶어서 이사를 했는데, 하필 시장 근처였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맹자가,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장사꾼들의 흉내를 내면서 노는 것이었다. 맹자의 어머니는 이곳도 아이와 함께 살 곳이 아니구나 하여 이번에는 글방 근처로 이사를 하였다.

 그랬더니 맹자가 제사 때 쓰는 기구를 늘어놓고 절하는 법이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법 등 예법에 관한 놀이를 하는 것이었다. 맹자 어머니는 이곳이야말로 아들과 함께 살 만한 곳이구나 하고 마침내 그곳에 머물러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어머니의 노력으로 맹자는 유가(儒家)의 뛰어난 학자가 되어 아성(亞聖)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맹자 어머니는 고금에 현모양처(賢母養妻)의 으뜸으로 꼽히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자녀교육에 있어서 환경이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이며, 또한 어린이들이 얼마나 순진무구한가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두산백과>

■ 삼청 三淸
[석 삼/푸를 청]

☞① 강원도 강릉을 일컫는 말 : 강릉은 맑은 물, 푸른 소나무, 깨끗하고 어진 마음으로 이름나 있다.-->청송(靑松), 청수(淸水), 청심(淸心) ②가야금의 넷째 줄 이름.  ③ 도교에서, 신선이 산다는 옥청(玉淸)·상청(上淸)·태청(太淸)의 세 궁(宮).

■ 삼한갑족 三韓甲族
[석 삼/나라 한]

☞우리 나라에서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
[예문]
▷ 셋을 맞고 하는 말이 삼한갑족 우리 낭군 삼강에도 제일이요 삼춘화류 승화시에 춘향이가 이 도령 만나 삼배주 나눈 후에 삼생연분 맺었기로 사또 거행은 못하겠소
---서울경기 속가 중 『십장가

밑도 없고 뿌리도 없고 가지도 없는 고단한 사노의 자식 편조가 임금도 마음대로 못하는 삼한갑족 지체 좋은 자기네들을 기탄없이 휘두를 줄은 생각도 먹지 않았던 일이었다.≪박종화, 多情佛心≫ 

■ 상가지구 喪家之狗
[죽을 상/집 가/어조사 지/개 구]

☞상가집의 주인 잃은 개. 여위고 지칠대로 지친 수척한 사람을 비유한 말. 또는 궁상맞은 초라한 모습으로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얻어 먹을 것만 찾아 다니는 사람.

[동]烏面鵠形(오면곡형) : 까마귀 얼굴에 따오기 같은 형상. 주려서 매우 수척한 사람. [속담] 보름에 죽 한끼 못먹은 사람이다./ 초상난 집 개.

[출전]史記, 孔子世家
[내용] :「孔子가 魯나라의 재상(대사구大司寇:지금의 법무부 장관)으로 국정개혁(國定改革)에 실패한 후 왕족 삼환(三桓)에게 배척당해 편력(遍歷)의 여행을 하였으나 아무도 공자를 받아주지 않았다.

 공자가 56세때 鄭나라에 갔을 때「정나라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자공에게 일러 말하기를“동문에 사람이 있는데 그의 이마는 요임금과 같고 그의 목은 고요와 같고 그의 어깨는 자산과 같다. 그러나 허리 아래로는 우왕에 미치지 못하기를 세 치요, 지친 모습은 상가의 개와 같았다.”자공이 공자에게 이실직고하니 공자가 기뻐 웃으면서 말하기를“모습은 훌륭한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그러나 상가의 개와 같다는 말은 그렇도다. 그렇도다. ”라고 대답 하였다.


[원문] 鄭人或謂子貢曰 東門有人한대“其?似堯요 其項類皐陶요 其肩類子産이라. 然自腰以下는 不及禹三寸이요 壘壘若喪家之拘라. ”子貢以實告孔子하니 孔子가 欣然笑曰“形狀未也라. 而似喪家之拘는 然哉로다. 然哉로다. 라고 하였다. ** 鵠(고니 곡) ?(이마 상) 肩(어깨 견) 腰(허리 요) 壘(맬 루) 欣(기쁠 흔) 哉(어조사 재)

[해설]오랫동안 떠돌아다녔고, 정치적으로 실의에 빠졌으며, 정나라에서도 뜻을 이루지 못한 공자의 모습은 말 그대로 볼품 없고 처량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 모습을 본 사람이 공자를 상가지구라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상갓집 개라고 천박하게 비유한 것에 대해서도 화를 내지 않은 것이 공자 자신만의 넉넉한 재치이며, 위대한 성인의 덕을 지닌 것에 대한 반증이다. 상가지구는 초상 집에서 주인이 돌보지 않으므로 굶주려 수척해진 개를 말한다.

 원래 공자의 초라한 모습을 비유한 것에서 유래한다. 한국 속담에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가 있는데, 이는 오갈 곳이 없어 그 처지가 보기에 딱하고 불쌍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참고]孔子라면 최고의 聖人인 만큼 모든 면에서 훌륭하다는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물론 凡人과는 다른 叡智(예지)와 高邁(고매)한 品德을 가진 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적인 면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역시 하나의 自然人으로서 슬프면 울고 기쁘면 울 줄 알았다.

그렇다면 돈에 대한 생각은 어떠했을까. 일찌기 13년간 轍環天下(철환천하)했을 때 자금을 댄 사람은 제자 子貢(자공)이었다. 지금말로 하면 産學協同이라고나 할까. 또 해외생활 중 곤궁한 경우를 당하여 喪家之狗(상가지구·상가의 개)라는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다.

 자연히 돈의 효용가치를 누구보다도 꿰뚫어 보았던 자다. 물론 그 역시 돈을 좋아해 이런 말까지 했다. ‘부귀를 위해서라면 마부노릇도 마다하지 않겠다(富貴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이 무슨 孔子답지 않은 소리인가? 그러나 다음 말이 중요하다.

‘富貴는 누구나 원하지만 정당한 방법이 아니거든 갖지 말 것이며 貧賤(빈천)은 누구나 싫어하지만 떳떳하다면 피하지 말 것이다(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孔子의 富貴觀이다. 그는 떳떳하지 못한 부귀를 ‘뜬구름’(浮雲)으로 여겼다. 하기야 東西古今을 막론하고 돈을 싫어했던 偉人(위인)이 어디 있었던가? 사실 所有慾(소유욕)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이다.

 절제된 물질욕은 인류문명을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 문제는 비뚤어진 인간의 욕심이다. 總理가 떳떳치 못한 富貴를 추구하다가 끝내 물러나고 말았다. 아쉽다.<동아일보--문화가 흐르는 한자>

■ 상궁지조 傷弓之鳥 [다칠 상/활 궁/어조사 지/새 조]

☞활에 상처를 입은 새는 굽은 나무만 보아도 놀란다. 한 번 궂은 일을 당하고 나면 의심하고 두려워하게 된다.

[동]경궁지조 [驚弓之鳥]
[속담]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 상분 嘗糞
[맛볼 상/똥 분]

☞지극한 효성/ 지나친 아첨

[출전]書言故事』/史記
[내용1] 남북조(南北朝)때 유검루(庾黔縷)는 이름난 효자였다. 그의 효행에 감동해 평소 출몰하던 호랑이가 자취를 감추기도 했다.  그가 잔릉(棧陵)의 현령(縣令)으로 있을 때 아버지의 병환 소식을 듣고 즉시 관직을 파하고 돌아갔다. 

 "병세(病勢)를 알기 위해서는 변의 맛을 봐야 하오."  의원(醫員)의 말에 검루는 즉시 손가락으로 변을 찍어 맛보았다. 마침 아버지는 이질에 걸려 심한 설사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달고 매끄러운 것이 여간 심상치 않았다. 

이때부터 그는 매일 밤 북진(北辰·북극성)에 빌었다.그의 효심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소리가 들려왔다.  "수명은 다했다. 다만 너의 효성을 봐서 이 달말까지만 연장해 주겠다."

[내용2]당(唐)나라에 곽홍패(郭弘覇)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시어사(侍禦史)라는 벼슬에 있을 때였다.  상관인 대부(大夫) 위원충(魏元忠)이 병으로 앓고 있었다. 상관이 병으로 몸져 누워 있자 동료들은 빠짐없이 병문안을 갔다. 그런데 곽홍패만은 나중에 혼자 몰래 병문안을 갔다. 그가 상관에게 말했다. 

"대변의 즙을 보여 주십시오."  이윽고 가져온 대변 즙을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달면 병은 낫지 않습니다. 다행히도 대부님의 것은 씁니다. 그러니 곧 쾌차하실 겁니다. 염려 놓으십시오." 

위원충은 그의 이 낯두꺼운 아첨에 배알이 뒤틀렸다. 그 후 병이 나아 조정에 나가자, 위원충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 사실을 폭로해 버렸다.

[내용3]와신상담의 고사로 유명한 월의 구천이 회계산의 치욕이후에 오나라 부차의 환심을 사기위해 부차가 병이 들었을 때 손수 그 변을 맛보았다고 한다   .

■ 상사병 相思病
[서로 상/생각 사/병 병]

서로 생각하는 병, 남녀 사이에 사랑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해 생긴병≒연병(戀病)·연애병·화풍병·회심병.

[출전]수신기(搜神記)
[내용] 춘추시대 강왕(康王)은 성격이 포악하여 간(諫)하는 신하는 모조리 죽였다.강왕의 시종중에 한빙(韓憑)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부인이 절세 미인이었다. 

 강왕은 강제로 한빙의 부인을 데려와 후궁으로 삼고 한빙에게는 없는 죄를 만들어  성단(城旦)의 형(변방에서 낮에는 도적지키고 밤에는 성을 쌓는 인부 일을 하는 형벌)에 처했다.

 이때 한빙의 아내는 남편을 못잊어 '비는 그칠줄 모르고 강은 크고 물은 깊으니 해가 나오면 마음이 좋을 것이다'라고 짧은 편지를 보냈는데 아쉽게도 전달되지 못하고 강왕의 손에 들어갔다. 이편지를 본 강왕의 신하 소하는 '당신을 그리는 마음을  어찌 할 길 없으나 방해물이 많아 만날 수 없으니 죽고 말 것을 하늘에 맹세한다'라고  그럴 듯 하게 해석하여 강왕에게 보고했다.

 얼마 뒤 한빙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하씨가 성위에서 투신자살을 했는데, '임금은 사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지만 나는 죽는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바라건대 한빙과 합장해 주십시요'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강왕은 괘씸하게 생각하고 오히려 두사람의 무덤을 멀리하여 장사지냈다.

 그 날밤 두 그루의 나무가 각각의 무덤 끝에 나더니 열흘도 안되어 아름드리 나무가 되어 위로는 가지가 서로 얽히고 아래로는 뿌리가 서로 맞닿았다.   그리고 나무 위에는 한 쌍의 원앙새가 앉아 서로 목을 안고 슬피 우니, 듣는 사람들이  다 눈물을 흘리며 이 새는 한빙 부부의 넋일 것이라고 했다.  송나라 사람들은 그 나무를 상사수(相思樹)라고 했는데, 상사병(相思病)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원문]宋人哀之 遂號其木曰 相思樹 相思之名 起於此也

[예문]상사병에 걸리다 / 상사병을 앓다 / 상사병이 나다 / 상사병이 들다.

■ 상아탑 象牙塔
[코끼리 상/어금니 아/탑 탑]

☞대학(大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학문과 진리를 탐구하는 상아탑./ 속세를 떠나 오로지 학문이나 예술에만 잠기는 경지. 프랑스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생트뵈브가 낭만파 시인 비니의 태도를 비평하며 쓴 데서 유래한다.(tour d'ivoire)

[예문]
▷ 베이컨은 인생을 넓게 살았다. 학문의 상아탑 속에 홀로 들어박혀서 책밖에 모르는 대학교수나 학자는 결코 아니었다.≪안병욱, 사색인의 향연≫

▷ 그 사람들은 문서가 가짜 증언이라고 믿고 있는데요." 티빙이 킬킬 웃었다. "로버트, 하버드의 상아탑이 자네를 연약하게 만들었구먼.

▷ 행동을 상반된 것으로 보면, 그 둘이 투쟁을 하는 가운데 우리는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상아탑에 묻힌 현실성 없는 엘리트주의자'니,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사기꾼'이니 하면서 어느 한쪽을..<책-미운오리새께의 출근>

[참고] 코끼리는 죽을 때가 되면 동족들이 죽은 장소로 모이는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코끼리의 무덤은 상아만이 남아 탑을 이루게 된다고 합니다. 육중한 몸은 다 썩어 없어져도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상아가 코끼리의 진수이다? 뭐 이런 의미에서 상아탑이 진리를 탐구하는 대학을 일컫게 되었다고 합니다

■ 상전벽해 桑田碧海
[뽕나무 상/밭 전/푸르를 벽/바다 해]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가 되었다. 세상이 몰라 볼 정도로 바뀐 것.
뽕밭[동]碧海桑田(벽해상전)./ 滄桑之變(창상지변). /陵谷之變(능곡지변) : 높은 언덕이 변하여 깊은 골짜기가 되고 깊은 골짜기가 높은 언덕으로 변한다.

[출전]神仙傳‘마고선녀이야기’에 나오는 말이지만, 유정지(劉廷芝)의 시 ‘대비백두옹(代悲白頭翁)’

[내용1] :「마고가 왕방평에게 일러 말하기를“스스로 모신 이래로 동해가 세 번 뽕나무 밭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번에 봉래에 이르니 물이 곧 갈 때 보다 얕아져 대략 반쯤이었습니다. 다시 언덕이 되려는 것입니까?”왕방평이 말하기를“동해가 다시 흙 먼지를 일으킬 뿐이다.”라고 하였다神仙傳

[원문]麻姑가 謂王方平曰 自接待以來로 見東海三變爲桑田한대 向到蓬萊하니 水乃淺於往者略半也라. 豈復爲陵乎아. 王方平이 曰 東海가 行復揚塵耳라.

[내용2]『代悲白頭翁』
洛陽城東桃李花 낙양성동도리화
飛來飛去落誰家 비래비거낙수가
洛陽女兒惜顔色 낙양여아석안색
行逢女兒長嘆息 행봉여아장탄식
今年花落顔色改 금년화락안색개
明年花開復誰在 명년화개부수재
實聞桑田變成海 실문상전변성해

낙양성 동쪽 복숭아꽃 오얏꽃
날아오고 날아가며 누구의 집에 지는고
낙양의 어린 소녀는 제 얼굴이 아까운지
가다가 어린 소녀가 길게 한숨짓는 모습을 보니
올해에 꽃이 지면 얼굴은 더욱 늙으리라
내년에 피는 꽃은 또 누가 보려는가
뽕나무 밭도 푸른 바다가 된다는 것은 정말 옳은 말이다 

[해설] 상전벽해는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한다는 의미에서 자신도 모르게 세상이 달라진 모습을 보고 비유한 말이다. 또한 뽕나무 밭이 바다가 될 수 있을지라도 사람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세월의 무상함을 연상케 하는 고사성어이므로, 그날 그날을 최선을 다하여 삶을 누리는 것이 지혜로운 인생살이이다.<네이버백과>

[예문]
▷ 윤동주(尹東株)가 세상을 떠난지 어느덧 30여 년의 세 월이 흘렀다. 그가 즐겨 거닐던 서강(西江)일대에는 고층 건물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창내 벌판을 꿰뚫고 흐르던 창내가 자취를 감추어 버릴 만큼, 오늘날 신촌(新村)은 그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다(잊지못할 윤동주 )

[속담] 상전벽해 되어도 비켜설 곳(이) 있다 --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가 되더라도 피할 길이 있다는 뜻으로, 아무리 큰 재해 속에서도 살아날 가망은 있음을 이르는 말.  

▷ 건설기계공업협회 윤영석 부장은 “1990년대에는 업체들의 과잉 경쟁과 영세한 딜러들을 중심으로 한 유통망 때문에 팔면 팔수록 손해를 보는 사업이었다”면서 “지금은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됐다”고 말했다.<2006 조선일보>

▷ “말두 말우 거긴 지금 육지야. 바다에 방둑을 쌓아 놓구, 추럭이 수십 대씩 돌을 실어 나른다구.”  
“뭣땜에요?”
“낸들 아나, 뭐 관광 호텔을 여러 채 짓는담서 복잡하기가 말할 수 없데.”
“동네는 그대루 있을까요?”
“그대루가 뭐요. 맨 천지에 공사판 사람들에다 장까지 들어섰는 걸.”
“그럼 나룻배두 없어졌겠네요.”
“바다 위로 신작로가 났는데, 나룻배는 뭐에 쓰오. 허허 사람이 많아지니 변고지, 사람이 많아지면 하늘을 잊는 법이거든.” 《황석영, ‘삼포 가는 길’에서》

■ 상중지희 桑中之喜
[뽕나무 상/가운데 중/어조사 지/기쁠 희]

☞남녀간의 밀회, 음사(淫事), 간통(姦通)
[출전]詩經(시경)〈용풍편(風篇)〉
[내용]
爰采唐矣 沬之鄕矣 원채당의 매지향의
云誰之思 美孟姜矣 운수지사 미맹강의
期我乎桑中 要我乎上宮 送我乎淇之上矣 기아호상중 요아호상궁 송아호기지상의

새삼을 캐는 곳이 메읍의 마을이라네
누구를 그리워하는가? 아름다운 맹강이구나
나와 뽕밭에서 기약하고 상궁에서 맞이하며 기수에서 전송했다네

爰采麥矣 沬之北矣 원채맥의 매지북의
云誰之思 美孟弋矣 운수지사 미맹익의
期我乎桑中 要我乎上宮 送我乎淇之上矣 기아호상중 요아호상궁 송아호기지상의

보리를 베는 곳이 메읍의 북쪽이라네
누구를 그리워하는가? 아름다운 맹익이구나
나와 뽕밭에서 기약하고 상궁에서 맞이하며 기수에서 전송했다네 

爰采葑矣 沬之東矣 원채봉의 매지동의
云誰之思 美孟庸矣 운수지사 미맹용의
期我乎桑中 要我乎上宮 送我乎淇之上矣 기아호상중 요아호상궁 송아호기지상의

순무를 캐는 곳이 매읍의 동쪽이라네
누구를 그리워하는가? 아름다운 맹용이구나
나와 뽕밭에서 기약하고 상궁에서 맞이하며 기수에서 전송했다네 

[해설]1절, 2절, 3절에 채당, 채맥, 채봉이 나오는데, 이는 야채를 채취한다는 의미에서 처녀성을 딴다는 뜻이 간접적으로 들어 있다. 상중지희는 부모나 주위 사람들의 축복을 받지 못한 남녀 간의 육체적인 사랑을 말하며, 때로는 불륜 관계도 뜻한다. 줄여서 상중이라고 하며, 동의어로는 상중지기(桑中之期), 상중지약(桑中之約), 상중지환(桑中之歡)이 있다. 한국 현대 소설에도 뽕나무 밭에서의 정사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도향의 소설 《뽕》이 그것이다. <두산백과>


■ 새옹지마 塞翁之馬
[변방 새/늙은이 옹/어조사 지/말 마]

☞변방에 사는 늙은이의 말. 인생의 길흉화복은 항상 변화가 많아 예측하기 어렵다.

[동] 塞翁得失(새옹득실)./ 塞翁禍福(새옹화복). /北失馬(북수실마) : 북방에 사는 늙은이가 말을 잃었다.
[유]生者必滅(생자필멸) : 살아 있는 것은 반드시 죽을 때가 있다. /苦盡甘來(고진감래) :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 /榮枯盛衰(영고성쇠) : 인생은 번성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한다. /吉凶禍福(길흉화복) : 길흉과 화복. 즉 사람의 운수를 이른다. /轉禍爲福(전화위복) : 화가 바뀌어 복이 됨. / 黑牛生白犢(흑우생백독) : 검은 소가 흰 송아지를 낳았다

[속담]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 된다.[陰地轉陽地變]

[출전]淮南子
[내용] :「국경 가까이 사는 사람 중에 점을 잘 치는 자가 있더니, 말이 까닭 없이 도망하여 오랑캐 땅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다 이를 위로하니 그 늙은이가 말하기를,“이것이 어찌 복이 되지 않겠는가?”했다. 수개월이 지난 뒤 그 말이 오랑캐 따의 준마를 데리고 돌아왔다.

사람들이 모두 이를 축하하니 그 늙은이가 말하기를,“이것이 어찌 뜻밖의 화가 되지 않으리오?”했다. 집에 좋은 말이 많은지라, 그 아들이 말타기를 좋아하더니 말에서 떨어져 다리뼈가 뿌러졌다.

사람들이 모두 이를 위로하니 그 늙은이가 말하기를,“이것이 어찌 뜻밖의 복이 되지 않으리오.”했다. 일 년이 지난 뒤, 오랑캐들이 크게 국경을 쳐들어 오니 장정들이 활을 당겨 싸워 국경 근처 사람 중 죽은 자가 열 가운데 아홉이 되었으나, 이 사람만이 유독 다리를 저는 까닭에 부자가 서로 목숨을 보존했다.

[원문] 近塞上之人에 有善術者러니 馬無故亡而入胡라. 人皆弔之한대 其父曰“此何遽不爲福乎아.”하더니, 居數月에 其馬가 將胡駿馬而歸라. 人皆賀之한대 其父曰,“此何遽不能爲禍乎아.”하더니, 家富良馬하여 其子好騎러니 墮而折其脾라. 人皆弔之한대 其父曰,“此何遽不爲福乎아”하더니, 居一年에 胡人이 大入塞하니 丁壯者는 引弦而戰하여 近塞之人이 死者十九로되, 此獨以跛之故로 父子相保라.
** 遽(급할 거) 墮(떨어질 타) 折(부러질 절) 脾(넓적다리 비) 弦(활시위 현) 跛(절름발이 파)父(노인 보)


[참고]
새옹에게는 아주 훌륭한 말이 한 마리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 말이 도망쳐 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새옹의 불행을 마치 자기 자신들이 당한 것처럼 슬퍼하며 노인을 위로했다.
그러나 새옹은 별로 슬퍼하지도 않고 이 불행이 더 큰 행복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느긋한 마음으로 살았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났다. 새옹은 이미 도망쳐버린 자신의 말을 기억 속에서 거의 지우고 있었다. 늦은 오후였다. 광야의 먼 지평선으로는 빠알간 저녁 노을이 곱게 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에선가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나마도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의 울음소리였다. '어? 이게 무슨 조화냐?' 새옹은 무슨 일인가 하고 마굿간 쪽으로 나가보았다.

“웬걸?” 뜻밖에도 두 달 전에 없어졌던 말이 어디로부터 데리고 왔는지 살찌고 기름진 암말 한 마리를 대동하고 나타난 것이다. '과연 화가 복으로 바뀌었구나!'첫눈에 보아도 암말은 명마였다. 늘씬한 다리에 털은 반질반질했다. 준마 정도가 아니라 천리마였다. 이게 웬 횡재냐!'
새옹은 좋아서 입이 함지박만 하게 찢어졌다.

 원래 천마(天馬)를 관할하는 별의 이름을 백락(伯樂)이라고 했다. 손양(孫陽)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비루먹어서 아무리 비실거리는 말이라도 그 말이 천리마임을 알아내는 혜안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를 일컬어 별칭 백락이라고 했다.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말이 있다. 그것을 천리마라 한다.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주파거리지만, 비범한 말이라면 그것이 가능한 것이라 하여 천리마 혹은 천마라 부르게 된 것이다. 문제는 어떤 명마라도 백락같은 눈이 없으면 그 말은 일생 동안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에서는 영웅을 천리마에, 명군(名君)을 백락에 비유했다. 아무리 훌륭한 인재라도 명군의 밝은 눈이 없으면 그를 찾아 쓸 수 없다는 얘기다.

 명마를 가진 가난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며칠 동안이나 마장으로 나가 말을 팔려고 했으나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할 수 없어 그는 명마를 끌고 백락의 집으로 갔다. 가서 울면서 호소했다.
“노모는 병들어 누워 계신데, 가난하여 약 한 첩 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말을 팔려고 여러 날 마장으로 나갔지만 아무도 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제 어두운 눈으로나마 보기에는 괜찮은 말 같은데, 선생님이 보시기에는 어떤지요. 정말 팔 수 없는 말일까요? 백락이 언뜻 바라보니 과연 명마였다. “내일 오전에 마장으로 다시 끌고 나오시오!”

 이튿날이었다. 백락이 나타나자 말 장사꾼들의 수군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나타났다. 백락이 나타났어!” 백락은 못 들은 척하고 말들 사이로 누비다가, 어제 집으로 끌고왔던 바로 그 말 주위를 몇 바퀴 빙빙 돌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감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깝다. 아까워!” 백락의 한 마디에 말값 배나 뛰고 말았다.

 어쨌건 새옹은 자신의 말도 찾고 명마도 공짜로 얻었으니 기분이 안 좋을 리 없었다.
그러나 새옹은 갑자기 웃음을 뚝 그쳤다. '아니다! 뭔가 석연치 않다!'새옹은 점을 쳐 보기로 했다. 산통을 흔들어 산가지를 뿌렸다.'귀신 이시여! 잃었던 내 말을 찾은데다, 명마까지 공짜로 얻었는데, 이것은 좋은 일입니까 나쁜 일입니까!'

 그런데 새옹의 눈이 동그래졌다. “앗! 이게 뭔가! 불길(不吉)로 나왔다!”이튿날이었다. 아침부터 마을사람들이 새옹의 집으로 모여들었다.“축하합니다! 잃었던 말이 호지의 명마까지 데리고 왔다면서요! 축하해마지 않습니다!”

 촌장의 축사에 새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아니오! 이 복이 화가 될 지도 모르는 일이오!” “공짜로 명마까지 얻었는데, 그게 무슨 화근이 되겠습니까?” “두고 볼 일이오.”새옹에게는 승마를 무척이나 즐기는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 저 새로 시집 온 암말은 저를 주시지요.” 새옹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된다! 저것은 수놈의 것이다! 인간이 타면 불길하다고 돼 있었다!”

 그러나 아들은 새옹의 주의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어느날 아들은 암말을 부친 몰래 가만히 끌고 나왔다. “저 들판의 끝까지 달려가자!” 좋은 말인데다, 아들은 너무 욕심을 내었기 때문일까. “으악!” 마음껏 속력을 내다말고 말의 앞발이 돌부리에 걸리는 통에 아들은 그만 앞으로 나뒹굴어졌고, 그 바람에 왼쪽 발목뼈가 부서지고 말았다.

“복이 화로 바뀐다고 하지 않았더냐!” 마을사람들이 또다시 새옹의 집으로 몰려들 왔다. 참 안됐습니다! 어쩌다가 이런 불행한 일이…!” 새옹은 자신있게 대꾸했다. “이런 화가 복이 될지 어떻게 알겠소!”

 아들이 절름발이가 된 지 한 해가 후딱 지났다. 그동안 점 따위는 치지 않았다. 흉노들이 중국의 요새 밑으로 밀물처럼 쳐들어 왔다. “마을의 젊은이들이여, 오랑캐를 막아야 한다! 모두들 전투에 참가하라!”

 그러나 새옹의 아들은 다리를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전쟁터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 전투에서 마을 젊은이의 십중팔구가 전사했으나, 새옹의 아들만은 종군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촌장이 부러운 듯이 중얼거렸다.  


[예문]
▷ 옛날에 어떤 시골 양반이 딸을 하나 두었습니다. 외동딸이라 시집이나 잘 보내 주어야겠다고 봇짐을 싸 갖고 사위감을 고르러 다녔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서당에 들어가 쉬게 되었죠. 그런데 글방의 아이들 중에서 퍽이나 잘생긴 아이 하나를 발견하고 마음에 들어 글방 선생에게 자기 심중을 털어 놓았습니다. 글방 선생은 쾌히 허락하면서,“그 아이는 바로 제 아들입니다.”하였습니다. 그래서 택일까지 해 놓고 돌아와 결혼할 날만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결혼하는 날 장가 오는 신랑을 보니 웬걸, 그 때 본 아이가 아니라 지지리도 못생긴 다른 아이였습니다. 당황을 했으나 할 수 없이 딸을 보내며,‘에라, 모르겠다. 제 팔자가 좋으면 잘 살겠지’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위는 글방 선생의 아들이 아니라 사동이었습니다.

 조실 부모를 해서 맡아 기르면서 지지리도 못난 놈이라 나무꾼 노릇을 시켰는데, 장가도 못 들고 해서 아들 대신 보냈던 것입니다. 그래도 딸 자식이라 5년 후쯤 아버지가 찾아가 보니 생각보다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딸에게 시집 잘못 보내 주어 후회하고 있다고 했더니 딸은 별말씀을 다 한다며 장을 열어 보이니, 돈이 꽉 차 있었습니다. 까닭을 물으니, 나무 장사를 해서 모았다고 말했습니다. 한참 있는데 쿵 하고 나뭇짐을 내려 놓는 소리가 나더니 사위가 들어오는데 미더워 보였습니다.

 그 후 10년이 되던 해 갑부가 되더니 아내를 돌보지 않고 산 속으로 들어가 3년간 공부한 후 과거에 장원 급제를 하여 딸 부부는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글방 선비의 아들은 끝내 가난한 선비로서만 지냈다고 합니다.

▷ 아키바라는 랍비가 나귀와 개와 함께 작은 램프 하나를 가지고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해가 저물어 어두운 밤이 되자 아키바는 한 채의 낡은 헛간을 발견하고 그 곳에서 하루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잠자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으므로 램프에 불을 붙이고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램프가 꺼져 버렸으므로 할 수 없이 그대로 잠을 청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잠든 사이에 늑대가 와서 개를 물어 죽였고, 사자가 나타나 나귀를 죽였습니다. 이튿날 아침, 하는 수 없이 램프만을 들고 혼자서 터벅터벅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어느 마을에 이르렀으나 한 사람의 그림자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간밤에 도둑떼가 쳐들어와서 집을 부수고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켰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일 바람 때문에 램프의 불이 꺼지지 않았더라면 그는 도둑에게 발견되었을 것이고, 개가 살아 있었더라면 개짖는 소리에 도둑들이 몰려왔을 것이고, 나귀도 역시 가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대신 그는 도둑으로부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속담] 인간 만사는 새옹지마라--인간의 길흉화복은 돌고 돈다는 뜻으로, 인생의 덧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새옹지마라고 다 볕 들 날도 오겠지.≪김원일, 불의 제전≫ 

■ 생면부지 生面不知
[날 생/얼굴 면/아니 불/알 지]

☞태어나서 만나 본 적이 없는 전혀 모르는 사람.
[예문]
▷ 내 조그만 희생이 동서 화합에 일말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흔쾌히 응하게 됐 다”고 말했다. 5·18 하루 전에 생면부지의 영·호남인간에 이뤄진 장기기증 행사 는 80년 5·18 이후 오랫동안 반목해온 두 지역간의 벽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무등일보>

▷ 10대소녀의 꺼져가던 생명이 생면부지인 한 일본 여성의 골수기증으로 되살아났다. 인하대병원 내과 김철수 교수(50)는 12일 『재생불량성 빈혈을 앓던 김현미양(인천 청학중 2년)이 지난 6월말 일본 여성으로부터 골수를 기증받아 이식 수술 끝에 현재 건강을 되찾고 있다』고 밝혔다. 김양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95년초 중증 재생불량성 빈혈에 걸린 사실이 밝혀지면서 수혈로 생명을 이어 왔다. <경향신문>

■ 생살여탈 生殺與奪
[날 생/죽일 살/줄 여/빼앗을 탈]

☞살리고 죽이고 주고 빼앗다. 남의 목숨이나 재물을 마음대로 하다.

[예문]
▷ 병사는 전쟁 중에 생살여탈의 권한을 잡은 사람이었다.≪박종화, 임진왜란≫
▷ 운명상으로 활인성을 띤 까닭에 생살여탈의 권세가 있어 일세의 영웅도 배출되는  묘한 격이다.직업은 군, 검,세무,관세,교사,경찰등이 좋으며 운세는 상하이다.    

■ 서시빈목 西施
[서쪽 서/베풀 시/눈살찌푸릴 빈/눈 목]

☞서시가 눈살을 찌푸린다는 뜻. ① 영문도 모르고 남의 흉내를 내서 웃음거리가 됨 ② 남의 단점을 장점인 줄 알고 본뜸
[동] 효빈(效), 서시봉심(西施捧心), 서시효빈(西施效).

[출전]『莊子』〈天運篇〉
[내용]춘추 시대 말엽, 오(吳)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월왕(越王) 구천(勾踐)은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절세의 미인 서시(西施)를 바쳤다. 그러나 서시는 가슴앓이로 말미암아 고향으로 잠시 돌아왔다.

 그런데 그녀는 길을 걸을 때 가슴의 통증 때문에 늘 눈살을 찌푸리고 걸었다. 이것을 본 그 마을의 추녀(醜女)가 자기도 눈살을 찌푸리고 다니면 예쁘게 보일 것으로 믿고 서시의 흉내를 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질겁을 해서 집 안으로 들어가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아무도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고 가난한 사람은 이것을 보고 처자를 이끌고 마을에서 도망쳤다.

 이 추녀는 미간을 찡그린 모습이 아름답다는 것만 염두에 두었을 뿐, 찡그림이 아름다운 까닭을 알지 못했다. 즉, 서시는 본래 아름다우므로 자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해설]《장자(莊子)》〈천운편(天運篇)〉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원래 반유교적(反儒敎的)인 장자가 외형에만 사로잡혀 본질(本質)을 꿰뚫어 볼 능력이 없는 사람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는 것으로 실로 의미심장(意味深長)하다.

 춘추 시대 말엽의 난세(亂世)에 태어난 공자가 그 옛날 주왕조(周王朝)의 이상 정치(理想政治)를 그대로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에 재현시키려는 것은 마치 '서시빈목'을 흉내 내는 추녀의 행동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 고사는 원래 공자의 제자인 안연(顔淵)에게 노(魯)나라의 악사장(樂師長)인 사금(師金)이 한 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이 장은 사금의 말을 빌려서 장자(莊子)가 공자의 상고주의(尙古主義)를 '외형에 사로잡혀 본질을 망각한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난한 것이다.  

장자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제도나 도덕도 변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춘추시대 말엽의 난세에 태어난 공자가 그 옛날 주왕조(周王朝)의 이상정치(理想政治)를 그대로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에 재현하려 하는 것은 마치 추녀가 서시를 무작정 흉내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빈정대어 말한 것이다

■ 서제막급 噬臍莫及
[씹을 서/배꼽 제/말 막/미칠 급]

☞배꼽을 물려고 해도 입이 미치지 않는다는 뜻. 곧 기회를 잃고 후회해도 아무 소용없음의 비유.
[원]서제(噬).[동] 후회막급(後悔莫及)

[출전]春秋左氏專』〈莊公六年條〉
[내용]기원전 7세기 말엽, 주왕조(周王朝) 장왕(莊王) 때의 이야기이다. 초(楚)나라 문왕(文王)이 지금의 하남성(河南省)에 있었던 신(申)나라를 치기 위해 역시 하남성에 있었던 등(鄧)나라를 지나가자 등나라의 임금인 기후(祁侯)는 '내 조카가 왔다'며 반갑게 맞이하여 진수성찬으로 환대했다.

 그러자 세 현인(賢人)이 기후 앞으로 나와 이렇게 진언했다."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머지 않아 저 문왕은 반드시 등나라를 멸하고 말 것이옵니다. 하오니 지금 조치하지 않으면 훗날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옵니다[ 臍莫及].'"

 그러나 기후는 펄쩍 뛰며 듣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어느 날, 문왕은 군사를 이끌고 등나라로 쳐들어왔다. 이리하여 등나라는 일찍이 세 현인이 예언한 대로 문왕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 석권 席卷  
[자리 석/ 말 권]

☞자리를 마는 것과 같이 토지 등을 공략하여 모두 차지함 

[출전]『史記』

[내용]유방의 한(漢)나라와 항우의 초(楚)나라가 천하의 패권을 다투고 있을 때였다.  위(魏)나라를 평정한 위표는 항우로부터 위왕에 봉해졌다.

 그러나 유방이 한중(漢中)으로부터 동쪽으로 진군, 황하를 건어오자 이번에는 유방편에 붙어 팽성에서 항우의 군사를 토벌하는데 앞장섰다. 

나중에 유방이 수세에 몰리다가 패하자 유방을 배반하고 항우편에 붙었다. 기회를 보아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하는 위표의 간사스러운 태도에 분개한 유방은 그를 잡아오게 했다.  결국 장군 한신에게 잡힌 위표는 유방의 명령에 따라 죽음을 당하고 만다. 

또 당시에 팽월이란 자가 있었는데 유방편에 붙어서 게릴라전으로 항우의 초나라 군대를 괴롭히곤 했다. 그의 공적을 인정한 유방이 그를 양왕(梁王)으로 삼았는데 나중에 항우군을 해하(垓下)에서 격파하는데 혁혁한 무공을 세우기도 한다.  그런 그에게 5년 뒤 유방이 반란군토벌을 위해 도움을 청하는데 듣지 않았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유방은 팽월에게 반란의 흔적이 있다고 덮어씌워 잡아 죽였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이 두 사람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위표와 팽월은 비천한 집안 출신으로 천리의 땅을 석권(席卷)했는데… 그 명성이 날로 높아졌지만 반란의 뜻을 품다가 결국 잡혀 죽음을 당했다."  두 사람은 지략에 뛰어나 한 몸이 무사하면 나중에 다시 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여겨 포로가 되는 것도 사양하지 않았다. 결국 천리의 땅을 석권한 위표와 팽월은 천하를 석권한 유방의 비위를 건드려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예문]
▷ 세계 시장을 석권하다
▷ 중국 대륙의 석권 / 선수들은 앞으로 남은 경기 모두를 석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 이번 대회에는 기량이 월등한 선수들만 참가하므로 전 종목 석권이 가능하다.
▷그동안 인근 고을을 차례로 석권한 북접의 손병희 군은 드디어 논산 벌을 향해 밀어 나갔다.≪유주현, 대한 제국≫ 

■ 선견지명 先見之明
[먼저 선/볼 견/어조사 지/밝을 명]

☞앞 일을 미리 내다보는 총명.

[예문]
▷ 선견지명을 가지다
▷ 그 시절에는 우연만치 똑똑하고 장래를 내다보는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라면 테 밖에 앉아서도 돈벌이를 상당히 할 수가 있었다.≪이기영, 고향≫
▷지휘자 사이먼 래틀이 이끄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홀스트의 선견지명을 미리 축하라도 하듯 3월16-18일 '별들을 향하여'(Ad Astra)'라는 정기 연주회에서 '행성'을 연주했다.<2006 연합뉴스> 

■ 선공후사 先公後私
[먼저 선/공변될 공/뒤 후/사사로울 사]

☞공사(公事)를 먼저 하고 사사(私事)를 뒤로 미룸.[동]滅私奉公

[출전]『史記』
[내용]조나라 혜문왕(惠文王)이 인상여(藺相如)를 재상을 삼으니 지위가 염파(廉頗-조나라의 명장군)보다 높았다.

 그러자 염파가 말하길 "내가 조나라의 장수가 되어 성을 공격하고 들에서 싸우는 큰공이 있는 데 인상여는 단지 말 좀 잘한다고 해서 도리어 나보다 높은 위치에 있으니 내가 그보다 밑에 있음을 부끄럽게 여긴다.

내(염파) 가 인상여를 보게 되면 필히 그를 혼내 주겠다." 하자 인상여가 그 소릴 듣고 조회 때 마다 늘 병을 핑개되어 염파와 더불어 서열을 다투지 아니하고 혹 나가다가 염파를 바라보면 즉시 피하니 인상여의 식객(食客)들이 다 그러한 인상여를 부끄럽게 여겼다.

그러자 인상여가 말하길 "막강한 진(秦)나라를 내가 욕을 보인 사람인데 유독 염장군을 두려워하겠는가? 막강한 진나라가 우리 조나라를 처들어오지 못하는 이유는 나와 염파 장군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두 호랑이 격인 나와 염파가 서로 싸운다면 그 형세가 둘다 온전하지 못할 것 이다.

 내가 염파 장군을 피하는 것은 국가의 급한 것을 먼저하고 사사로운 원망을 뒤로하기 때문이지 무서워서 겁을 내는 것이 아니다." 하고 말 한데서 연유되었다.물론 인상여와 염파는 이 일로 인해 죽음을 같이 할 좋은 교유관계를 맺었다

[예문]
입만 열면 先公後私(선공후사: 公的인 것을 먼저 하고 私的인 것은 뒤로 미룬다)니 先難後獲(선난후획: 어려운 일을 먼저 하고 대가는 뒤에 생각한다)을 말하고, 심지어는 滅私奉公(멸사봉공: 私를 죽이고 公을 받든다)을 부르짖으면서 실제로 백성의 위에 앉은 사람들은 어떠했는가.<한국사회의 私와 公>-중앙일보

▷ 예는 의(義)를 바탕으로 하고 인(仁)을 배경으로 합니다. 의는 정당성이요, 공평이요, 책임이요, 도리입니다. 달리 말하면 선공후사(先公後私)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예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2006 경향신문 기고>

■ 선농단 先農壇
[먼저 선/농사 농/제단 단] 

☞조선시대와 중국에서 농사와 인연이 깊은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주신(主神)으로 모시고 풍년들기를 기원하던 제단.

[해설]조선 태조 때부터 동대문 밖 전농동(典農洞:현 동대문구 祭基洞) 선농단에 적전(籍田)을 마련하고 경칩(驚蟄) 뒤의 첫번째 해일(亥日)에 제(祭)를 지낸 뒤 왕이 친히 쟁기를 잡고 밭을 갈아 보임으로써 농사의 소중함을 만백성에게 알리는 의식을 행하였다.

기원은 신라 때까지 거슬러올라가며,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태조 이래 역대 왕들은 이곳에서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며 선농제를 올렸다.

선농단 앞에는 밭을 마련하여 제사가 끝나면 왕이 직접 경작을 하면서 권농에 힘썼다. 행사 때 모여든 많은 사람을 대접하기 위하여 쇠뼈를 고은 국물에 밥을 말아낸 것이 오늘날의 설렁탕이라고 한다. 선농탕이 설렁탕으로 음(音)이 변한 것이다.

제단은 사방 4m의 석축단(石築壇)이었는데, 《한경식략(漢京識略)》에는 1476년(성종 7)에 선농단을 축조하여 왕이 친히 제를 지내고 적전을 갈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선농단 친경(親耕)은 1909년까지 행해지다가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폐지되었다.

[참고]설렁탕 : 설렁탕의 원말은 '선농탕'이다. 이것은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선농제(先農祭)에 진열했던 음식에서 비롯된다. 고려 이후 조선조까지 매년 경칩을 지나 첫 해일(亥日)이 되면 동대문밖 보제원 동쪽 마을에 선농단을 쌓아 두고 농사짓는 법을 후대에 가르쳤다는 신농씨(神農氏)의 신위를 모셔 놓고 임금이 참석한 가운데 선농악(先農樂)을 연주하며 제를 지냈는데 이때 주된 음식이 선농탕이었다. 

■ 선우후락 先憂後樂
[먼저 선/따를 종/높을 외/시작할 시] 

걱정할 일은 남보다 먼저 걱정하고, 즐거운 일은 남 다음에 자신의 즐거움을 찾음. 곧, 목민관(牧民官)의 자세.
[예문]"천하가 걱정하는 것을 앞서서 걱정하며, 뒤에 천하의 즐거움을 누릴지어다. 이런 어진 사람이 없으면 나는 누구를 좇아 함께 갈 것인가? "<악양루기>

■ 선종외시 先從
[먼저 선/따를 종/높을 외/시작할 시] 

☞먼저 외로부터 시작하라. 큰 일을 이루려면 먼저 작은 일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동]先從自始(선종자시)/先施於隗(선시어외) /買死馬骨(매사마골) : 죽은 말 뼈다귀를 사다. 즉 소용없는 것을 산 후 쓸모있는 것이 오기 를 기다린다. /千金買骨(천금매골) / 請自隗始(청자외시)

[속담]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落落長松(낙락장송)도 근본은 種子

[내용] : 전국시대 燕나라는 齊나라에게 영토의 태반(太半)을 정복당했다. 어느 날 소왕(昭王)은 재상 곽외(郭)와 그 방법을 의논하니,“옛날 어느 임금이 천금(千金)을 걸고 천리말을 구하려 했으나, 3년이 지나도록 뜻을 이루지 못해 사람을 시켜 구하도록 하여 천리마를 찾았으나 도착하기 전에 죽고 말았습니다.

 곽외가 죽은 말의 뼈를 500금에 사 임금에게 바치니 크게 화를 내며 꾸짖었으나 그는 죽은 말의 뼈를 오백 금이나 주고 샀으니 천리마를 가진 자들이 훨씬 높은 가격으로 받기 위해 몰려들 것이라고 진언하였습니다. 소왕(昭王)은 반신반의 하였으나 채 1년도 되지 않아 천리말을 끌고 이른 자가 세사람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폐하께서 현재(賢才)를 구하시려 한다면 이 외()로부터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저와 같은 사람도 후대받고 있는데 하물며 그보다 어진 사람들이야 이를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참고]
곽외는 웃으며 말하였다.

“죽은 말의 뼈를 천금을 주고 샀다는 임금에 대한 소문이 천리마 세 필을 불러오게 하였다면, 전하께서 부족한 저부터 신임하여 우대해 주셨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면 저보다 더 훌륭한 인재들이 모두 전하께 의지하러 오게 될 것입니다. 비록 신은 죽은 말의 뼈에 지나지 않으나 전하께서 저를 등용하여 천리마처럼 아끼신다면 사방에서 살아 있는 천리마들이 올 것이므로 궂이 각 지방으로 사람을 보내 인재를 찾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곽외의 의견은 탁월한 것이었다.

곽외의 말에서 ‘천금매골(千金買骨)’이란 고사성어가 나온 것. 그리고 “임금께서 궂이 어진 선비를 부르시고자 하신다면 먼저 저로부터 시작하여 주십시오.(王必欲致士 先從如)”라는 말에서는 ‘청자외시(請自始)’란 고사성어가 나온 것이다.

청자외시.

이는 ‘자기 자신을 자기가 추천한다는 말’로 때로는 ‘선종외시(先從始)’라고도 불려진다. 어쨌든 곽외의 작전은 그대로 들어맞는다.

악의(樂毅)라는 무장은 위나라 사람이었으나 소왕이 곽외를 의지하고 새로운 집을 지어주고, 스승인 사장으로 섬긴다는 소문을 전해 듣자 연나라로 와서 상장군이 되었던 것이다.

악의는 조, 초, 한, 위, 연의 연합군을 이끌고 당시 최강국이었던 제나라를 토벌하여 수도 임치를 함락시키고 70여개의 성을 빼앗고 모든 재보를 연나라로 옮겨 버린 것이다.

이때가 기원전 284년.

제나라의 선왕이 연나라를 정벌한 지 불과 34년 후의 일에 불과하였으니, 일찍이 맹자가 ‘지금 어진 정치를 하지 아니한다면 이는 천하의 무기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왕께서 속히 명령을 내리시어 노약자들을 돌려보내고 중요한 제기를 가져오는 것을 중단시키고, 연나라 백성들과 논의하여 임금을 새로 세운 뒤에 철수하십시오.’라고 충고하였던 왕도정치의 경세지략은 34년 후에 그대로 들어맞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패도정치는 일시적으로 힘으로 정복하여 승리하는 듯 보이지만 한 순간의 영광에 불과하며 왕도정치는 얼핏 보면 무능하고 나약한 통치이념처럼 보이지만 곧 승리하여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니, 제자 베드로가 칼을 빼어 잡으러 온 사람의 귀를 잘라버리자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다.’라고 말하였던 예수의 말과 상통하는 진리인 것이다.

어쨌든 맹자는 십만종의 녹봉과 빈사(賓師)의 대우를 마다하고 제나라를 떠날 결심을 한다.

평소에 맹자는 “나는 맡은 관직도 없고 말한 것에 책임도 없으니 진퇴가 어찌 너그럽고 여유 있지 않겠는가.(我無官守 我無言責也 則吾進退豈不綽綽然有餘裕哉)”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삼경(三卿)의 지위에 올랐으나 이처럼 맹자는 ‘나아가고 물러섬’에 있어 언제나 분명하고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맹자도 제나라에 대한 미련만은 쉽사리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맹자가 제나라의 국경에서 꼬박 3일간을 머물러 있었다는 모습에서 알 수 있다. 맹자는 마음속에 또 하나의 환상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떠나면 선왕이 크게 후회하여 사람을 보내 자기를 붙잡고 회유하여 다시 불러들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맹자는 제나라의 선왕에게 큰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신문>

■ 선즉제인 先則制人
[먼저 선/곧 즉/누를 제/사람 인]

☞먼저하면 남을 제압한다. 무슨 일이든 남보다 빨리하면 유리하다.
[출전]先則制人 後則制於人(論語). 먼저 하면 남을 제압하고 나중에 하면 남에게 제압을 당한다/ 先則制人 後則人制<史記 항우본기>

[동]先發制人(선발제인) : 먼저 시작하면 남을 제압한다. /先聲奪人(선성탈인) : 먼저 큰 소리를 쳐 남의 기세를 꺾다.

[속담] 먼저 먹는 놈이 장땡이다.

■ 선풍도골 仙風道骨
[신선 선/바람 풍/도인 도/뼈 골]

☞신선의 풍채. 도사와 같은 골격. 남달리 뛰어난 풍모를 가진 사람. 또는 비범한 사람..

[예문]
기고만장하던 선풍도골의 호한도 일단 이 방에 들어오면 실탄도 들어 있지 않은 경찰관의 권총을 흘낏흘낏 바라보며 좀 봐 달라는 애원을 서슴지 않는 것이다.≪김성일, 무차원 근처≫

▷ 대(竹)와 황토, 갯벌의 정신을 남도 풍류의 핵심으로 파악하는 그는 이 지역의 생활과 문화, 역사를 두루 아우르는 기행문을 통해 잃어버린 풍류정신을 오늘에 되살릴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다. 남도풍류의 원조인 최치원을 선풍도골의 캐릭터로 개발하자는 제안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인터넷 한겨레>

■ 선행후교 先行後敎
[먼저 선/행할 행/뒤 후/가르칠 교]

☞선인의 행위를 들어 후학을 가르침.

■ 설부화용 雪膚花容
[눈 설/살갗 부/꽃 화/얼굴 용]

☞흰 살결에 고운 얼굴. 미인의 얼굴.
[동]花容月態,(화용월태),丹脣皓齒(단순호치),明眸皓齒(명모호치),傾國之色(경국지색),傾城之美(경성지미), 반야가인(半夜佳人), 담장가인(澹粧佳人),진수아미(榛首蛾眉), 단장가인(斷腸佳人) , 천향국색(天香國色), 羞花閉月(수화폐월), 침어낙안(沈魚落雁)

[예문]논개가 옷을 안 입은 채 설부화용의 고운 자태를 그대로 드러내 놓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면야….≪박종화, 임진왜란≫  

■ 설상가상 雪上加霜
[눈 설/위 상/더할 가/서리 상]

☞눈 위에 서리가 더함. 불행이 거듭 생기는 일..
[속담]엎친데 덮친격/조약돌을 피하니 수마석이 막아선다/흉년에 윤달 [동]禍不單行화불단행 : 재앙은 홀로 오지 않음혼

[예문]
▷ 그 때 돌연히 숙부님이 어떤 사건으로 피검(被檢)이 되자, 나는 시골 어느 절간에 가 지내려던 피서 계획을 포기하고, 괴로운 여름 한 철을 서울서 나게 되었다. 물론, 숙부님의 사건이란 <중략> 만주에서 발단된 '대종교 사건'의 연루라는 것으로, 숙부님 검거, 금광 채굴 중지, 가택 수색, 이 세가지를 한꺼번에 당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 김동리, 『화랑의 후예』 중에서

▷ 아침부터 해가 떨어질 때까지 산을 허물어 내고, 흙을 나르고 하기란, 고향에서 농사일에 뼈가 굳어진 몸에도 이만저만한 고역이 아니었다. 물도 입에 맞지 않았고, 음식도 이내 변하곤 해서, 도저히 견디어 낼 것 같지가 않았다. 게 다가 병까지 돌았다. 일을 하다가도 벌떡 자빠지기가 예사였다.-- 하근찬수난이대

▷ 시간도 없는데 설상가상으로 길까지 막혔다.
▷  눈보라가 몰아쳐 산을 오르기가 어려웠는데 설상가상으로 주위마저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 설왕설래 說往說來
[말씀 설/갈 왕/말씀 설/올 래]

☞서로 말이 오고 감. 어떤 일의 시비(是非)를 가리기 위해 옥신각신하다.
[동]言去言來(언거언래). 言往說來(언왕설래).

[예문]
▷ 군기고를 깨자는 둥, 아니, 그것은 국법에 걸리는 일이니 황사평으로 가서 동촌 백성과 합세하자는 둥, 설왕설래 중구난방으로 입방아를 찧을 뿐 장두 없는 무리들이라 의견이 모아지지가 않았다.≪현기영, 변방에 우짖는 새≫

▷ 아침부터 그들은 재개발 문제로 설왕설래했지만 결국 결론을 내지 못했다 / 그가 교장으로 부임하자 교사들간에 그에 관한 이야기가 설왕설래하였다.

■ 섬섬옥수 纖纖玉手
[가늘 섬/옥돌 옥/손 수]

☞가녀리고 가녀린 옥같은 손이라는 말로 가냘프고 고운 여자의 손.

[예문]

    모시를 이리저리 삼아 두루삼아 감삼다가
    가다가 한가운데 뚝 근처지거늘 호치단순으로
    흠빨며 감빨아 섬섬옥수로 두끝 마조 잡아
    바브ㅣ어 이으리라 저 모시를
    우리도 사랑 긋쳐 갈 제 저 모시같이 이으리라 <작자미상>

▷ 손은 섬섬옥수는 아니었지만 두둑하고 부드러워 보였다.≪박완서, 미망≫

▷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낙랑 공주의 섬섬옥수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할 때에, 대장부의 흉리(胸裏)가 어떠했을까?≪정비석, 비석과 금강산의 대화≫

▷ 영화에서 흔히 사용되는 이러한 '역전식 구성'이 무용극 '춘향전'의 흥미를 상당수준 끌어올릴 듯 한데, 먼저 극은 옥에 갇힌 춘향이의 회상장면으로 시작된다. 화사한 봄의 첫 만남에서 부터 섬섬옥수를 뿌리치며 떠나는 이별까지를 표현한 1막에는 특히 3쌍의 춘향과 이몽룡 커플이 등장해 만남과 사랑, 그리움의 감정을 분담한다<춤으로 풀어내는 춘향전>

■ 성동격서 聲東擊西
[소리 성/동녘 동/칠 격/서쪽 서]

☞병법의 하나로 동쪽을 친다고 소리 질러 놓고 실제로는 서쪽을 친다.

[내용]제·한·위가 연합하여 연나라를 공격했을 때의 일이다. 연나라를 돕기 위해 북진한 초나라 군사가 위나라의 중요한 성을 함락시키자 세 나라는 모두 놀라서 도망을 갔다. 그런데 목적을 이룬 초나라 군사가 본국으로 돌아오려 하자 성의 서쪽에 한나라 군사가 진을 치고 있고 동쪽에는 제나라 군사가 진을 치고 있어서 군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초나라 군사를 지휘하는 경양(景陽)은 여러 가지로 궁리한 끝에 우선 서쪽 성문을 열고 낮에는 전차와 군마, 밤에는 횃불을 움직여 초나라의 군사(軍使)가 한나라 군사와 자주 연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제나라 군사는 한나라가 초나라 군사와 은밀히 연합하여 자기를 공격해 오지나 않을까 의심하고 군사를 이끌고 철수해 버렸다. 놀란 것은 남아 있는 한나라 군사였다. 그들은 우세한 초나라 군사가 반격해 오면 큰일이라 생각하고 야음을 틈타 황급히 도망을 치고 말았다. 그래서 초나라 군사는 유유히 귀국할 수 있었다.

[참고]  '통전(通典)'에 "말로는 동쪽을 친다 해 놓고 실은 서쪽을 친다"라고 하였다. 고대 병서에는 이것을 말한 것이 아주 많다.
"그러므로 적을 잘 움직이는 자는 이를 유도, 유혹하면 반드시 적이 이에 따른다."--- 손자(孫子)·병세(兵勢)
"서쪽이 필요할 때는 그 동쪽을 친다."--- 육도(六韜)·병도(兵道)
"이(利)는 동쪽을 놀라게 하여 서쪽을 치는 일이다."--- 무비적요(武備摘要)
"동쪽에 소리질러 서쪽을 치고, 그쪽에 소리지르고 이쪽을 치면 적이 방비할 곳을 알지 못한다. 그때 방비가 없는 곳을 치면 된다."--- 백전기략(百戰奇略)
"동쪽을 가려면 서쪽으로 유혹하고, 진격하는 것 같으면 도망치는 채, 도망치는 것 같으면 이쪽에서 진격하는 것처럼 한다."--- 역대명장사략(歷代名將事略)

■ 성묘 省墓
[살필 성/무덤 묘]

☞ 조상의 묘를 찾아 보살핌, 또는 그런 일. 주로 설, 추석, 한식에 한다.≒간산(看山)·배묘(拜墓)·성추(省楸)·전묘(展墓)·참묘.

[내용]省은 '눈(目)으로 작은 것(少)을 살펴본다'는 뜻으로 '보다', '살피다'가 된다. 省察, 反省이 있다. 또 '생'으로 읽으면 '아끼다', '줄이다'는 뜻이 된다.  省略이 그렇다.

  墓는 莫과 土의 結合으로 莫의 아래에 있는 '大'는 본디 '艸'의 變形이므로 해(日)가 아래 위의 풀숲 사이에 빠져 있는 形狀, 곧 西山에 지려고 하는 모습이다.  

 따라서 莫의 본디 뜻은 '어둡다', '해가 지다'가 된다. 후에 '禁止'로 轉用되자 해를 뜻하는 日을 덪 붙여 暮(저물 모)를 새롭게 만들었다. 곧 墓는 '어두운 땅(土)', '무덤'인 것이다.  墓碑, 墓祭, 共同墓地, 墳墓가 있다.

  省墓라면 祖上의 무덤을 찾아 돌보고 겸하여 禮를 올리는 것으로 一名 拜墳, 拜掃禮라고도 한다.  封墳 주위의 나무나 풀을 돌아보고 가시나무나 雜草 등을 잘라내 깨끗이 정리하는 것으로 보통 伐草라고도 한다.  그런 다음 간단히 음식을 올리고 祖上을 追慕하며 동시에 가족간의 紐帶를 다지는 契機로 삼기도 한다.

  중국 사람들은 淸明에 省墓를 하는데 '掃墓'라 부른다.  우리의 경우 설, 端午, 寒食, 秋夕 등 4대 名節에 省墓를 했는데, 지금은 보통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한다.  寒食의 省墓는 풀이 잘 자라게 하는데 目的이 있고, 秋夕의 省墓는 이듬해에 잘 자랄 수 있도록 整備하는데 目的이 있다.  물론 祖上을 追慕하는 것이 가장 큰 目的임은 말할 나위 없다.  곧 孝의 具體的인 表現인 것이다.

[예문]
▷ 할아버지 산소에 성묘하다
▷ 한식을 맞아 성묘를 갔다.
▷ 우리는 지난 주에 할아버지 선영에 성묘하러 시골에 내려갔다.
▷ 자랏골 사람들의 명절은 성묘 오는 산주들 뒷바라지에 항상 남의 추석이고 남의 설이었다.≪송기숙, 자랏골의 비가≫

■ 성하지맹 城下之盟
[성 성/아래 하/어조사 지/맹세할 맹]

☞적에게 성을 정복당하고서 항복하여 맺은 강화(講和)의 맹약(盟約). 대단히 굴욕적인 강화.
[참고] 성(城)의 역사를 살펴보면 동 서양을 막론하고 성은 최고 통치자의 안보를 위해 세워졌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서양의 성(castle)은 정권의 상징적 공간으로 생성되었기에 건물의 형태로 발달한 반면, 동양의 성(城)은 거주민들의 안보를 위해서 생성되었기에 도성, 산성 등의 형태로 구분되고 발달했다.

 기록상 나타난 최초의 성곽은 춘추시대(BC 770∼476)다.『만국사물기원역사』에 따르면,“오월춘추(吳越春秋)에 城을 쌓아 군을 지키고 郭을 을 만들어 백성을 지켰으니, 이것이 성곽의 효시다.

 중국의 성문은 기본적으로 한 면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삼문(三門)으로 되어 있었다. 옛날에는 성문 전면에 옹성이라는 소곽(小郭)을 설치했다. 이 옹성의 상징성은 매우 강해서 농성(籠城)이란 말을 낳았다.

 즉 정예 병사들이 지키던 옹성이 무너지면 성 안으로 들어가 성문을 굳게 잠그고 철저하게 성을 지켰는데 이를 농성이라 했다. 이에 유래하여 오늘날 농성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을 뜻한다.

 한편, 중국에서는 장군이 있는 성의 한가운데에 호화스런 깃발을 세우고 장군의 위세를 과시했다. 이 깃발은 깃대의 끝을 황백색의 상아로 장식하고 거기다 교묘한 조각을 하는 등 볼품있었다. 이 깃발을 아기(牙旗)라 불렀고, 대장군이 있는 성을 아성(牙城)이라고 했다. 오늘날 아성은 아주 중요한 근거지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성은 외적으로는 어떤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그 주위를 둘러막은 성곽의 개념이 강했다. 수도의 보위를 위해서 도성, 왕궁의 보위를 위해서 궁성(宮城), 각 지방의 행정 소재지를 보호하기 위해서 읍성(邑城) 등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요처에 미리 쌓아놓은 성들도 적지않다. 그런 성의 하나로 우리 편의 근거지를 삼기 위하여 산 위에 쌓은 것을 산성(山城)이라 하고 요지를 따라 한 줄로 쌓아 적을 방어하는 것을 행성(行城)이라 한다.

 남한산성은 한 맺힌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 임금이 이곳에 피신하였으나,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 수항단으로 나가 항복하는 굴욕을 치렀다.

■ 성혜 成蹊
[ 이룰 성/ 지름길(샛길) 혜 ]

☞샛길이 생긴다는 뜻. 곧 덕(德)이 높은 사람은 자기 선전을 하지 않아도 자연히 사람들이 흠모하여 모여듦의 비유.

[원] 도리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下自成蹊). 
[출전]  『史記』 李將軍列傳 

[내용] 전한 6대 황제인 경제(景帝:B.C. 157∼141)때 이광(李廣)이라는 명장이 있었다. 

당시는 북방 흉노족(匈奴簇)과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때인 만큼 이광의 무용담 (武勇談)도 자연히 흉노족과의 전쟁과 결부된 이야기가 많은데 이 이야기도 그중 하나이다. 

어느 날, 이광은 불과 100여 기(騎)를 이끌고 적 후방 깊숙이 쳐들어가 목적한 기습 공격에 성공했다. 그러나 곧 적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정면 돌파는 불가능 하다고 판단한 이광은 부하 장병들에게 이렇게 명했다. 

"침착하라. 그리고 말에서 내려 안장을 풀어라." 

적은 깜짝 놀랐다. 그 행동이 너무나 대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표를 찔린 적은 필연 뭔가 계략이 숨겨져 있을 것으로 믿고 주춤했다. 

이때 이광은 10여 기를 이끌고 질풍처럼 적진에 돌입하여 한칼에 적장을 베었다. 그러자 적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달아났다. 이리하여 이광은 한 사람의 병사도 잃지 않고 개선했다. 

그 후에도 많은 무공 을 세운 이광을 칭송하여 사마천(司馬遷)은 그의 저서 사기(史記) 이장군 열전(李將軍列傳)〉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장군은 언변은 좋지 않았으나 그 덕과 성실함은 천하에 알려져 있었다. 복숭아와 오얏 꽃은 아무 말 하지 않아도[桃李不言:덕 있는 사람의 비유] 그 아름다움에 끌려 사람들이 모여들므로 '나무 밑에는 자연히 샛길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下自成蹊].' "

■ 세군 細君
[가늘 세/임금 군]

☞본래는 제후의 부인을 일컫던 말, 남에게 자기의 아내를 말하거나, 남의 아내를 말할 때, 한문 편지 따위에서, 자기의 아내를 이르는 말. 동방삭이 그의 아내를 농담 삼아 부른 데서 유래

[내용]한무제(漢武帝) 때 관리 가운데 동방삭(東方朔)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재치와 기지가 남달리 뛰어났다. 사실 그가 관리로 등용된 것도 뻔뻔스러우리 만큼 배짱 좋은 기지 때문이기도 하다. 

한무제가 천하의 재능 있는 자들을 구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치 문제에 관해 논의했던 것과 달리, 동방삭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랑만 늘어 놓았었다. 

그러나 한무제는 그런 동방삭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 당시는 한여름 복날이 되면 상시랑(常侍朗;시종관)들에게 고기를 나누어 주는 관례가 있었다. 이날도 상시랑들은 임금이 내린 고기를 나누어 줄 관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관리가 저녁 늦도록 오지 않자, 동방삭은 주위에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 칼을 들고 고기를 잘랐다. 주위에 있던 관리들이 그의 뜻밖의 행동에 당황해하자, 동방삭은 태연히 농담 섞인 어조로 말했다. 

“복날이라 빨리 집으로 가야 합니다. 하사품은 잘 받아 갑니다.” 

그리고는 집으로 내달려갔다. 다음날, 고기 분배를 담당했던 관리는 동방삭이 형식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하사품을 가져간 것을 무제에게 보고했다. 무제는 그 당장 동방삭을 불러 무례함을 꾸짖고 직접 자기를 비판하도록 했다. 

그러자 동방삭은 두 번 절하고 이렇게 말했다. 

“삭이여, 삭이여, 
어명을 기다리지 않고 하사품을 받아 갔으니 아주 무례하구나! 
칼을 빼어 고기를 자르다니 정말 용감하구나! 
고기를 자르되 많이 갖지 않았으니 정말로 깨끗하구나! 
집에 가지고 가서 세군(細君)에게 주니 인정이 넘치는구나!” 

무제는 동방삭이 처음에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 듯하여 고개를 끄덕였지만, 끝까지 듣고 보니 도리어 자신을 칭찬하고 있음에 그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동방삭은 기지가 넘쳐 흘렀다. 무제는 그런 동방삭에게 술 한 섬과 고기 백 근을 내렸다. 

[참고]중국 전한 무제 때(BC 110년경)의 강도왕 유건의 딸. 흉노(匈奴)를 견제하기 위해 톈산산맥[天山山脈] 북방에서 간쑤성[甘肅省] 서부에 걸쳐 세력을 떨치고 있던 오손국(烏孫國)의 왕(王號는 昆莫)에게 무제의 공주[皇女]로 위장해 시집갔다. 《한서(漢書)》

<서역전(西域傳)>에 의하면, 시집가 보니 왕은 노령인 데다 언어도 통하지 않아, 슬픈 마음으로 ‘원컨대, 황곡(黃鵠)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소서’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훗날 그 나라의 풍속에 따라 왕의 손자에게 재가(再嫁)하여 딸 하나를 낳았으나, 재가한 지 4∼5년 뒤에 죽었다고 한다. <두산백과>

■ 세속오계 世俗五戒
[세상 세/속될 속/다섯 오/경계할 계]

☞신라 진평왕때 원광법사가 화랑들에게 지켜야 할 것으로 제시한 다섯 가지 계율.
[내용]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불가의 오계에 대하여 세속적인 儒家의 덕목에 비추어서 만든 것으로 당시 청년의 지도이념이 되어 화랑도의 정신과 함께 실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

■ 세월부대인 歲月不待人
[해 세/달 월/아니 불/기다릴 대/사람 인]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세월을 아껴라.
[출전] : 『귀거래사(歸去來辭)』로 유명한 진(晉) 나라의 전원시인 도연명(陶淵明)의 권학시(勸學詩) 다.
[내용]

    [잡시 雜詩]
    人生無根체하니    인생은 뿌리도 꼭지도 없으니
    飄如陌上塵로다    들길에 날리는 먼지와 같도다.
    分散逐風轉하니    흩어져 바람 따라 굴러다니니
    此已非常身이라    이것이 이미 불변의 몸뚱아리 아니다.
    落地爲兄弟하니    태어나면 모두가 형제가 되는 것
    何必骨肉親이리오 어찌 꼭 한 핏줄 사이라야 하랴.
    得歡當作樂하니    즐거울 땐 응당 풍류 즐겨야 하니
    斗酒聚比隣이라    한 말 술로 이웃과 어울려 본다네.
    盛年不重來하니    한창 시절은 거듭 오지 않으니,
    一日難再晨이라    하루는 두 번 새기 어렵다.
    及時當勉勵하니    때에 미쳐 힘써야 하니,
    歲月不待人이라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참고]

勿謂今日不學而有來日오늘 배우지 아니하여도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말며,
勿謂今年不學而有來年금년 배우지 아니하여도 내년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日月逝矣 歲不我延 세월이 흘러가도다. 세월은 나를 위해 늘어나지 아니하노니,
嗚呼老矣 是誰之愆아 늙었도다. 이것이 누구의 허물인고.--勸學文 - 주희(朱熹)

少年易老學難成하니,소년은 늙기가 쉽고 학문은 이루기가 어려우니,
一寸光陰不可輕이라.짤막한 시간이라도 가벼이 여기지 말지니라.
未覺池塘春草夢한대 못가에 돋아난 봄 풀의 꿈을 아직 깨닫지도 못했는데,
階前梧葉已秋聲이라.뜰 앞의 오동잎은 벌써 가을 소리라-偶成(우연히 이름)朱熹

■ 세한고절歲寒孤節
[해 세/추울 한/외로울 고/계절 절]

☞추운 계절에도 혼자 푸르른 대나무./ 겨울.

[예문]

    눈 마자 휘어진 대를 뉘라셔 굽다턴고.
    구블 節(절)이면 눈 속에 프를소냐?
    아마도 歲寒孤節(세한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원천석, 병와가곡집>

[참고]
◑傲霜孤節(오상고절) :가을, 서릿발이 심한 추위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홀로 꼿꼿하다. 충신 또는 국화, 가을

    국화야, 너난 어이 삼월 춘풍 다 지내고
    낙목한천(落木寒天)에 네 홀로 피었나니
    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이정보>

◑氷姿玉質(빙자옥질) : 얼음같이 맑고 깨끗한 살결과 아름다운 자질. 매화의 이칭,봄

    빙자옥질(氷姿玉質)이여 눈ㄷ속에 네로구나
    가마니 향기 노아 황혼월(黃昏月)을 기약하니
    아마도 아치고절(雅致高節)은 너뿐인가 하노라.<안민영 ,매화사>

■ 세한송백 歲寒松栢 [해 세/추울 한/소나무 송/잣나무 백]

☞추운 계절에도 소나무와 잦나무는 잎이지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굳은 절개.
[동]雪中松栢(설중송백) : 눈 속에서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송백.
霜風高節(상풍고절) : 곤경에 처하여도 굽히지 않는 서릿발 같은 높은 절개.

[참고]歲寒然後知松栢之 後彫也『(논어』--추운 겨울이 지난 후에 소나무 잣나무가 나중에 시듦을 안다

■ 소국과민 小國寡民
[작을 소/나리 국/적을 과/백성 민]

적은 나라 적은 백성, 노자가 이야기하는 가장 이상적인 국가형태
[출전]『노자(老子)』
[내용]나라는 작고 백성도 적어서, 다른 사람의 열 배나 백 백의 재주가 있는 사람이 있어도 쓰지 못하게 한다. 백성들로 하여금 죽음을 중히 여기게 하고, 멀리 이사 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타고 갈 곳이 없고, 갑옷과 군대가 있어도 진칠 곳이 없게 해야 한다. 백성들로 하여금 새끼줄을 묶어 다시 문자로 사용하게 하고 그 음식을 달게 여기며 그 옷을 아름답게 여기며 그 거처를 편안하게 여기고, 그 풍속을 즐겁게 여기게 해야한다.

 이웃나라가 서로 바라보이고 닭과 개의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이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못하게 해야한다

[해설]노자는 계속해서 “다시 옛날로 돌아가 새끼를 묶어서 문자로 사용하게 하며, 그 음식을 달게 여기고 그 옷을 아름답게 여기며, 그 거처를 편안하게 여기고 그 풍속을 즐겁게 여기게 해야 한다.

 이웃나라가 서로 바라보이고 닭과 개의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이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노자는 문명의 발달이 생활을 풍부하고 화려하게 하지만, 인간의 노동을 감소시키고 게으름과 낭비와 생명의 쇠퇴현상을 가져온다고 하면서 소박하고 작은 소국과민의 사회를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과 같은 이상사회, 이상국가로 보았다.

즉, 소국과민이란 문명의 발달이 없지만, 갑옷과 무기도 쓸 데가 없는 작은 나라에 적은 백성이 이상적 사회요 이상적 국가임을 일컫는 말이다.<네이버백과>

[원문]小國寡民, 使有什佰之器而不用, 使民重死而不遠徙. 雖有舟輿, 無所乘之, 雖有甲兵, 無所陳之, 使人復結繩而用之. 甘其食, 美其服, 安其居, 樂其俗. 隣國相望,  鷄犬之聲相聞, 民至老死不相往來.

■ 소년이로 학난성 少年易老 學難成  
[쉬울 이/늙을 로/ 배울 학/어려울 난/이룰 성])

☞소년은 늙기 쉬우나 학문을 이루기는 어렵다는 말.
[출전]--주자(朱子)의《朱文公文集》〈勸學文〉

    少年易老 學難成 소년이로 학난성
    一寸光陰 不可輕 일촌광음 불가경
    未覺池塘 春草夢 미각지당 춘초몽
    階前梧葉 已秋聲 계전오엽 이추성

    소년은 늙기 쉬우나 학문을 이루기는 어렵다
    순간 순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마라
    연못가의 봄풀이 채 꿈도 깨기 전에
    계단 앞 오동나무 잎이 가을을 알린다

[참고]주자십회(朱子十悔)

不孝父母, 死後悔 불효부모 사후회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돌아가신 후에 뉘우친다.

不親家族, 疎後悔 불친가족 소후회
가족에게 친절히 하지 않으면, 멀어진 뒤에 뉘우친다.

少不勤學, 老後悔 소불근학 노후회
젊을 때 부지런히 배우지 않으면, 늙어서 뉘우친다.
 
安不思難, 敗後悔 안불사난 패후회
편안할 때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으면, 실패한 뒤에 후회한다.

富不儉用, 貧後悔 부불검용 빈후회
부유할 때 아껴쓰지 않으면, 가난하게된 후 후회한다.

春不耕種, 秋後悔 춘불경종 추후회
봄에 밭갈고 씨뿌리지 않으면, 가을이 된 후에 후회한다.
 
不治垣墻, 盜後悔 불치원장 도후회
담장을 미리 고치지 않으면, 도둑 맞은 후에 후회한다.

色不謹愼, 病後悔 색불근신 병후회
이성을 삼가지 않으면, 병든 후에 후회한다.
 
醉中妄言, 醒後悔 취중망언 성후회
술 취해서 망언한 것은, 술 깨고 난 후에 후회한다.
 
不接賓客, 去後悔 부접빈객 거후회
손님을 잘 대접하지 않으면, 손님이 떠난 후에 후회한다.

■ 소인묵객 騷人墨客
[풍류 소/사람 인/먹 묵/손 객]

☞시문(詩文)이나 서화(書畵)를 일삼는 사람.--시인,문사,서가,화가
[참고]騷人→楚의屈原을 따르던 무리를 일컸던 말→ 風流人,騷客

**단오(端午)의 유래 : 楚나라 회왕(懷王)때 굴원(屈原)이라는 신하가 간신들의 모함에 자신의 지조(志操)를 보이기 위하여 멱라수에 투신 자살을 하였는데 그 날이 바로 음력 5월 5일 이었다.《열아세시기》에는 이날 밥을 수뢰(물의 여울)에 던져 굴원을 제사지내는 풍속이 있으므로‘수릿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