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수자천
毛遂自薦
[터럭 모/이룰,마침내 수/스스로 자/천거할 천]
☞자기가
자신을 추천함. |
■ 모순 矛盾
[창 모/방패
순]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서로 일치되지 아니함. [내용] :「초나라 사람
중에 방패와 칼을 파는 사람이 있어 이것을 좋다고 자랑하며 말하기를,“이
방패는 굳고 단단하여 ?히 뚫을 수 없다.”하고, 또 그 창을 자랑하며
말하기를,“이 창의 날카로움은 어떤 물건이든지 뚫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길“그러면 그대의 창으로 그대의 방패를 뚫는다면
어찌되겠소?”하니, 그 사람이 능히 대답을 못 하더라. [참고] 모순은 한비자가 요순이래의
덕치를 이상으로 하는 儒家를 비판한 것이다.곧, 창과 방패는 요와 순을
나타낸다.요임금 때에 순이 농부의 사움과 어부의 분쟁을 조절하고 陶器가
조악해지는 것을 막았다. 공자는 이러한 사실을 '성인의 감화'라고 기렸지만
한비자는 이 부분을 自家撞着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예문] |
■
목경지환 木梗之患
[나무 목/인형 경/어조사
지/금심 환]
☞나무인형의 근심. 타향에서 객사하여 돌아옴. 맹상군은 제후와 빈객들을 모두 불러들여 귀천의 구분 없이 후하게 대접했다. 이 때문에 그의 식객은 수천 명이나 되었으며, 그가 어질다는 소문은 각지로 퍼져 나갔다. 맹상군의 서쪽의 진나라 소왕을 만나기 위해 진나라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의 일이다. 빈객들이 백 번이나 간언하였지만 듣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 세상의 일로 나에게 간언하는 것은 전부 아는 일이다. 만일 영적인 세계의 일을 들어 나에게 간언을 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를 죽일 것이다." 알자가 들어와 말했다. "영적인 세계의 일을 주청하러 빈객이 찾아왔습니다." 맹상군은 말했다. "들여보내라." 빈객이 말했다. "신은 이곳으로 오면서 치수 위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흙으로 만들어진 인형이 마침 나무인형과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무인형이 흙인형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흙인데 인형으로 만들어졌군요. 폭우가 쏟아져 내려 물이 불면,당신은 무너지는 것을 막느라 부서지게 될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흙인형이 응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막다가 나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당신은 정원에 있던 복숭아나무인데 깎여 인형이 되었군요. 큰 비가 내려 물이 불면, 당신은 반드시 둥둥 떠내려 오면서 멈출 줄을 모를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지금 진나라는 사방이 요새로 막혀 있는 강한 나라인데다가 호랑이와 이리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진나라로 들어가 나무인형의 화를 입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맹상군은 진나라로 가지 않았다. |
■ 목불식정 目不識丁
[눈
목/아니 불/알 식/고무래 정]
☞눈이 정자도 알지 못한다. 쉬운 글자도 모르는 매우 무식한 사람. [원문]天下가 無事한대 而輩挽石弓은
不如識一丁字라 |
■ 목불인견 目不忍見
[눈
목/아니 불/참을 인/볼 견]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딱하거나 참혹한 상황. |
■ 목인석심 木人石心
[나무
목/사람 인/돌 석/마음 심]
☞의지가 굳어 어떠한 유혹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
가충은 원래 위나라의 대신이었는데 서진 건국에 이바지한 공적 때문에
한창 위세를 떨치고있는 사람이었다. 하통의 소문을 듣고 있던
가충은 그를 수하에 둠으로써 자기의 위세를 드높일 속셈으로 하통을
찾은 것이었다. 가충은 온갖 감언이설로 회유했지만 하통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런다고 유혹에 넘어갈 하통은 아니었다. 울화통이 터진 가충은
이렇게 말했다. "지위, 권세, 여색, 세 가지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놈은 세상에 없을 것이나 이 사람은 정말로
나무로 만든 사람이고 돌로 만든 마음(木人石心)이군."
가충은 관직을 권할 것을 포기하고, 하통은 회계로 돌아갔다.
그후의 일은 전해져 있지 않으나, 그 부동한 태도는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는 것이다. |
■ 목탁 木鐸
[나무
목/큰 방울 탁]
☞불교에서 독경(讀經)이나
염불을 욀 때 사용하는 불구(佛具).세상
사람들을 각성시키고, 가르쳐 인도하는 사람 옛날에는 달력이 귀했으므로 백성들이 절기(節氣)에 따른 농사일을 알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통치자는 그때 그때 해야 할 일을 백성들에게 알렸는데 이때 사용했던 것이 목탁(木鐸)이다. 그 일을 맡은 관리는 매년 봄만 되면 커다란 방울을 치면서 시내(市內)를 돌아다녔다. 그 소리를 듣고 사람이 모여 들면 '봄이 왔으니 씨를 뿌려라'고 알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 방울 속의 혀가 나무로 돼 있었으므로 목탁(木鐸)이라고 했다. 물론 쇠로 된 것도 목탁(木鐸)이라고 했는데 주로 군대내에서 명령을 하달할 때 사용하였다. 후(後)에 불교가 전래되고 절기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서 목탁(木鐸)은 사찰에서만 사용되었는데 이 역시 식사(食事)나 염불 시간 등 공지 사항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어느 경우든 목탁(木鐸)은 어떤 사실을 널리 알리는데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후(後)에는 백성들을 교화(敎化), 인도하는 자(者)를 목탁(木鐸)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공자(孔子)였다. 공자가 노(魯)나라에서 벼슬을 그만 두고 자기의 이상을 실현시킬
나라를 찾기 위해 유세(遊說) 여행을 하고 있던 무렵이다. 한번은
위(衛)나라에 갔는데, 의(儀)라고 하는 국경을 지키는 관원이 찾아왔다. |
■ 목후이관 沐猴而冠
[목욕할
목/ 원숭이 후/ 어조사 이/ 갓 관]
☞목욕한
원숭이가 갓을 씀. 사람 행세를 못함. 표면은 근사하게 꾸몄지만 속은
난폭하고 사려가 모자람 항우(項羽)는 스스로 황폐하게 한 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아 팽성(彭城)으로의
천도(遷都)를 결심했다. 함양이라면 천혜의 요새로 패업(覇業)의
땅이었다. 간의대부(諫議大夫) 한생 (韓生)이 수 차례 간했지만 항우(項羽)는 화를 내면서 그를 멀리했다. 한생은 탄식하고 물러 나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원숭이를 목욕시켜 관을 씌운 꼴이군(沐후而冠)." 그런데 이말을 항우(項羽)가 듣고 말았다. 무식했던 그는 무슨 뜻인줄 몰라 진평 (陳平)에게 물었다. "폐하를 흉보는 말인데 세가지 뜻이 있지요. 원숭이는 관을 써도 사람이 못된다는 것, 원숭이는 꾸준하지 못해 관을 쓰고 조바심을 낸다는 것, 그리고 원숭이는 사람이 아니므로 만지작거리다 의관을 찢어버리고 만다는 뜻입니다." 격분한 항우(項羽)는 그를 끓는 기름가마에 던져 삶아 죽이고 말았다. 죽을 때 한생(韓生)이 말했다. "두고 보아라. 유방(劉邦)이 너를 멸하리라. 역시 초(楚)나라 사람들은 원숭이와 같아 관을 씌워도 소용이 없지." 결국 항우(項羽)는 함양(咸陽) 뿐만 아니라 천하(天下)를 몽땅 유방(劉邦) 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
■ 몽진 蒙塵
[무릅쓸
몽/티끌 진]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 쓴다는 뜻으로 나라에 난리가 있어 임금이
나라 밖으로 도주함. |
■묘항현령 猫項懸鈴
[고양이 묘/목 항/매달 현/방울 령]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 실행하지 못할 일을 공연히 의논만 함 [원문] 群鼠
會話曰 "穿庾捿 生活可潤 但所 獨猫而已", 有一鼠 言曰,
"猫項 若懸鈴子 庶得聞聲而遁死矣" 群鼠喜躍曰, "子言
是矣 吾何所 耶". 有大鼠 徐言曰,"是則是矣, 然 猫項 誰能爲我懸鈴耶",
群鼠 愕然 ≪고금소총古今笑叢≫ |
■ 무골호인 無骨好人
[없을
무/뼈 골/좋을 호/사람 인]
☞뼈없이 좋은 사람. 지극히 순하고 남의 비위를 두루 맞추는 사람. |
■ 무궁무진 無窮無盡
[없을 무/다할 궁/없을 무/다할 진]
☞끝이 없고 다함이 없다.
꽃 꺾어 산 놓고 무진무진 먹세 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줄이어매여 가나 유소보장의 만인이 울어에나 어욱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 숲에 가기곧 가면 누른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소소리 바람 불제 뉘한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위에 잿남이 휘파람 불 제야 뉘우친들 어이리 |
■ 무념무상 無念無想
[없을
무/생각 념/없을 무/생각 상]
☞일체 상념(想念)이 없는 담담한 마음의 상태. |
■ 무뢰한 無賴漢
[없을
무/의지할 뢰/사람 한]
☞성품이 막되어 예의와 염치를 모르며, 일정한 소속이나 직업이
없이 불량한 짓을 하며 돌아다니는 사람. ≒뇌자(賴子). |
■ 무릉도원 武陵桃源
[굳셀
무/언덕 릉/복숭아 도/물줄기 원]
☞무릉의 도원. 지상의 낙원으로 인간의 도원경(桃源境). [예문] |
■ 무면도강 無面渡江
[없을 무/얼굴 면/건널 도/강 강]
☞실패하고 고향에 돌아갈 면목이 없다. [동]何面目見之 [내용]《사기(史記)》의 〈항우열전(項羽列傳)〉에
다음의 이야기가 나온다. 중국 진(秦)나라 말기에 유방(劉邦)과 항우(項羽)는
천하의 패권을 놓고 서로 겨루게 되었다. 이제 탈출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항우는 부하들을 보며 "나는 군대를
일으켜 오늘에 이르기까지 70여 번의 싸움을 했지만 단 한번도 패한
일이 없었다. 항우는 적장 한 명의 목을 베는 용맹을 보였으나 대세를 어쩌지 못하고
동쪽으로 도망가 우장강[烏江]에 이르렀다. 우장강에서 배를 준비하고
기다리던 정장(亭長)이 "'강동(江東)'이 좁다고는 하지만 땅이
사방 천리나 되며, 사람들은 수십 만이나 있습니다. |
■ 무병자구 無病自灸
[없을
무/질병 병/스스로 자/뜸 구]
☞질병이 없는데 스스로 뜸질을 한다. 불필요한 노력을 하여 정력을
낭비함 [출전]『장자(莊子』잡편 '도척' 공자는 도척이 천하의 악당이 되어 잘못을 범하는 것은 그 자신은
물론이고 유하계의 수치로 생각하고 설득하러 찾아갔다. 공자가 노나라의 동문 밖에 이르렀을 때 마침 유하계를 만났다. 유하계가
말했다. "요즘 며칠 동안 뵐 수가 없었는데 거마의 행색으로
보아 혹 도척을 만나러 갔던 게 아닙니까?" 공자는 하늘을
우러르며 한숨을 짓고 대답했다. |
■ 무불간섭
無不干涉
[없을 무/아니 불/범할 간/건널 섭]
☞남의 일에 나서서 참견하지 않음이 없다. 자기와는 상관도 없는
일에 공연히 간섭하고 참견하지 말라. |
■ 무산지몽 巫山之夢
[무당 무/뫼 산/어조사 지/꿈 몽]
☞무산(巫山)의 꿈. 남녀간의 밀회(密會)나 정교(情交) [출전]『文選 』宋玉 高唐賦 "소첩(小妾)은 무산에 사는 여인이온데 전하께오서 고당에 납시었는 말씀을 듣자옵고 침석(枕席:잠자리)을 받들고자 왔나이다." 왕은 기꺼이 그 여인과 운우지정(雲雨之情:남녀간의 육체적 사랑)을 나누었다. 이윽고 그 여인은 이별을 고했다. "소첩은 앞으로도 무산 남쪽의 한 봉우리에 살며,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되어 양대(陽臺) 아래 머물러 있을 것이옵니다." 여인이 홀연히 사라지자 왕은 꿈에서 깨어났다. 이튿날 아침,
왕이 무산을 바라보니 과연 여인의 말대로 높은 봉우리에는 아침 햇살에
빛나는 아름다운 구름이 걸려 있었다. 왕은 그곳에 사당을 세우고 조운묘(朝雲廟)라고
이름지었다. |
■ 무소부지 無所不知
[없을
무/바 소/아니 불/알 지]
☞알지 못하는 바가 없다. 매우 박학다식(博學多識)함. |
■ 무신불립 無信不立
[없을
무/믿을 신/아니 불/설 립]
☞신의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이르는 말. [내용2]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학자로 북해(北海) 태수를 지낸 공융(孔融:153∼208)은 조조(曹操:155∼220)의 공격을 받은 서주(徐州) 자사 도겸(陶謙)을 구해주려고 자신의 군사와 함께 유비(劉備:161∼223)에게 공손찬(公孫瓚:?∼199)의 군사를 빌려서 도겸을 도와주게 하였다. 공융은 군사를 가지면 유비의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비에게 신의를 잃지 말도록 당부하였다. 그러자 유비는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에 실린 공자(孔子:BC 552∼BC 479)의 말에 따라 "성인은 '예부터 내려오면서 누구든지 죽지만 사람은 믿음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고 하였습니다. 유비는 군대를 빌릴지라도 이곳으로 꼭 돌아올 것입니다"라고 공융에게 말하였다고 전해진다. 믿음과 의리가 없으면 개인이나 국가가 존립하기 어려우므로 신의를
지켜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삼국지(三國志)》 |
■ 무용지물 無用之物
[없을 무/쓸 용/어조사 지/만물
물]
☞아무 쓸모없는 물건이나 사람.≒부췌附贅, 군더더기 ▷ 교인들에게 낭패를 당한 김 군수로서는 큰맘 먹고 수리한 감옥이 자칫 무용지물이 될 판인지라 꿩 대신 닭이라고 교인 대신 만만한 적객 몇을 골라 집어넣을 꾀를 낼 만도 했다.≪현기영, 변방에 우짖는 새≫ |
■ 무위도식 無爲徒食
[없을 무/할 위/다만 도/먹을 식]
☞하는 일 없이 헛되이 먹기만 함. 게으르거나 능력이 없는 사람.≒유식(遊食) |
■ 무위이치 無爲而治
[없을 무/할 위/말이을 이/다스릴 치]
☞함이 없이 다스려 짐, 인위적으로 뭔가를 하려고 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잘 다스려 짐을 [동]무위지치(無爲之治) |
■ 무위이화 無爲而化
[없을 무/할 위/말이을 이/화할 화]
☞애써 공들이지 않아도 스스로 변화하여 잘 이루어짐. 성인의
덕이 크면 클수록 백성들이 스스로 따라나서 잘 감화됨. 인간은 지혜나 기술이 향상되면 될수록 괴상한 것들이 나타나고 법률이 정밀해지면 해질수록 죄인은 많아진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말한다. "내가 하는 것이 없으면 백성은 스스로 和하고, 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而民自正 또 노자(老子)는 말한다. "'도(道)'는 언제나 무위(無爲)이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일체를 하고 있다. (道常無爲而 無不爲)" 老子의 말은 계속된다. "후왕(侯王)이 만약 능히 이 '도(道)'를 잘 지키면 만물은 자연히 화(化)하려 한다.(侯王若 能守之萬物將自化)"고. |
■ 무장공자 無腸公子
[없을 무/창자 장/공변될,존칭 공/아들,존칭 자]
☞담력이나 기개가 없는 사람을 비웃어 하는 말. 게의 별칭.
제 땅 얻어 종횡으로 마음껏 다니누나 창자 없는 게가 참으로 부럽도다 한평생 창자 끊는 시름을 모른다네 |
■ 무지몽매 無知蒙昧
[없을 무/알 지/어릴 몽/어두울 매]
☞아는 것이 없이 어리석음. |
■ 무하유지향 無何有之鄕
[없을 무/어찌 하/있을 유/어조사 지/고향 향]
☞인위적인 그 무엇도 있지 않은 곳으로 풀이되며
장자가 말하는 이상향을 뜻함 |
■ 묵묵부답 默默不答
[말없을 묵/대답할 답]
☞입을 다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음. |
■ 묵자비염 墨子悲染
[먹 묵/존칭 자/슬플 비/물들일 염]
☞묵자가 물들이는 것을 슬퍼한다는 말로, 사람들은 평소의 습관에
따라 그 성품과 인생의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는 뜻. [원문]子墨子見染絲者 而歎曰 染於蒼則蒼 染於黃則黃 所入者變 其色亦變 五入必而已則 其五色矣 故染不可不愼也 非獨染絲然也 國亦有染. |
■ 묵적지수 墨翟之守[墨守]
[먹
묵/꿩 적/어조사 지/지킬 수]
☞굳건히 성을 지킴. 자기 의견이나 주장을 굳이 지킴. 묵자가 성을
지키는데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너무 완고하여 변통할 줄 모르거나
자기의 의견이나 주장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 [준]墨守묵수 ‘전쟁이란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섰을 때에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비웃음만 사게 되지요. 제가 보기에 楚가 宋을 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결국 荊王은 宋을 치지는 않았지만 墨子의 말은 믿지 않았다. 그러자 墨子가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제가 城을 지킬테니 公輸般으로 하여금 치도록 해 보십시요.’ 과연 公輸般이 아홉번이나 공략했지만 끝내 墨子가 지키는 城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번에는 公輸般이 城을 지키도록 했는데 墨子는 아홉번이나 함락시켰다. 荊王은 그제서야 公輸般의 사다리가 缺點(결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리하여 墨子가 城을 지킨 고사는 일약 유명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墨子가 城을 굳게 지킨 것을 ‘墨守’라고 했는데 전통이나 我執(아집),
또는 偏見(편견)에 사로잡혀 조금도 태도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도
墨守라고 했다. 일종의 固守(고수), 死守(사수)인 셈이다. --<문화가
흐르는 한자> |
■ 문경지교 刎頸之交
[목벨
문/목 경/어조사 지/사길 교]
☞생사를 같이 할 수 있는 매우 소중한 벗. |
■
문과식비 文過飾非
[꾸밀 문/허물 과/꾸밀 식/아닐 비]
☞허물도 꾸미고 잘못도 꾸민다. 잘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뉘우침도 없이 숨길 뿐 아니라 도리어 외면하고 도리어 잘난 체함. |
■
문과즉희 聞過則喜
[들을 문/허물 과/곧 즉/기쁠 희]
☞남의 비평을 진심으로 잘 받아들이는
것. 맹자가 말하였다. "자로는 남이 잘못한 것이 있다고 하면 기뻐하였고, 우임금은 좋은 말을 들으면 절을 하였다(子路人告之以有過則喜 禹聞善言則拜). 위대한 순(舜)임금은 그보다도 더하였다. 남과 함께 하기를 잘해서 자기를 버리고 남을 좇아 남의 의견을 취해 선을 행하기를 즐거워하였다." 자로는 공자(孔子)의 제자 가운데 가장 거칠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본디 무뢰한이었으나 공자의 가르침을 받아 나중에는 공자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신 사람 중 하나이다. 공자는 특히 그를 많이 깨우쳐 거친 것을 잡아주었고, 그의 과단성과 용기를 좋아하였다. 맹자는 여기서 자로나 우임금·순임금의 예를 들어,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보다는 남의 비판이나 의견을 먼저 들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남이 자신의 잘못을 일러주면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여 자신을 살필 수 있고, 그렇게 된 후에야 비로소 남과 더불어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양약고어구(良藥苦於口)'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좋은 약도 입에는
쓰다는 뜻으로, 충언(忠言)은 귀에 거슬리나 결국은 자신에게 이롭다는
말이다. 하물며 자신의 허물을 말하는데 오히려 즐거워했던 자로는 존경받을
만한 인격을 도야하여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
■ 문방사우 文房四友
[글월
문/방 방/넉 사/벗 우]
☞글방의 네가지 벗. 종이, 붓, 벼루, 먹.(紙筆墨硯)=문방사보(文房四寶) ·문방사후(文房四侯) [내용]문방이란 문한을 다루는 곳 즉 ,문사들의 방이란 뜻이다. 문방에 없어서는 안 될 종이, 붓, 먹, 벼루를 문방의 사우라 하며 혹은 문방사후, 사보라고도 한다. 문방사후란 것은 사우를 의인화시켜 각각 벼슬이름을 붙여 준 것이다. 중국에서는 예부터 문인의 서재를 문방이라 하고 수업의 장으로 존중해왔으며 문방구를 애완 하는 역사는 한·위·진으로 더듬어 올라갈 수 있으나, 남당의 이욱이 만들게 한 이정규묵·남당관연··오백현의 붓은 남당4보라 부르고 문방구 역사의 기초를 이루었다. 송대에 이르러 이런 문방구 애완의 풍조가 더욱 고조되고, 종류도 연적·필세·도장 등 45종에 이른다. 한국에서는 고구려의 승려이며 화가인 담징이 이미 610년일본에 건너가 채색종이·먹의 제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어 문방의 역사를 말해준다. 붓: 짐승의 털을 추려서 모아 원추형으로 만들어 죽관(竹管) 또는 목축(木軸)에 고정시킨 것으로 호(毫)의 끝을 봉(鋒), 호의 끝부분 반을 전호(前毫), 그 필두(筆頭)까지의 짧은 털은 부호(副毫)라 한다. 털로 된 모필 이외에도 죽필(竹筆)·고필(藁筆)·갈필(葛筆) 등 특수한 것이 있다. 호는 주로 토끼털(紫毫라고도 함), 양털을 비롯하여 이리·너구리·사슴·족제비·말·고양이·노루등의 털과 쥐수염·닭털·태발(胎髮) 등으로도 붓을 맨다. 털이 부드러운 붓을 유호필(柔毫筆), 탄력이 큰 털로 맨 붓을 강호필(剛毫筆)이라 하고 유호에 강호심(剛毫)을 박은 것을 겸호필(兼毫筆)이라 한다. 또 털의 길이가 긴 것을 장봉(長鋒), 짧은 것을 단봉(短鋒), 보통의 것을 중봉(中鋒)이라 한다. 토끼털은 중추(仲秋) 무렵의 것을 상질로 치고, 사슴털은 여름 것을 취한다. 필관은 대개 대나무를 쓰지만 나무·골각·보옥·금은·도자 등으로 만들기도 한다. 먹:먹[墨]의 시초는 중국의 한대(漢代) 초라는 정설이 있다. 붓은 진대(秦代)의 몽염(蒙恬)이, 종이는 한대의 채륜(蔡倫)이 발명하였다고 하나, 먹의 발명자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만 붓을 쓰기 시작한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발명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먹이 발명되기 이전에는 문자를 골편(骨片)이나 금석(金石)에 새겼다. 이를 갑골시대(甲骨時代)·금석시대라 한다. 그 후 인지(人智)와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문자의 사용범위가 넓어지고, 갑골문이나 금석문만으로는 기록하기가 어려워지자 대나무 조각이나 나뭇조각 또는 천 등에 문자를 쓰게 되었다. 이때를 죽간시대(竹簡時代)라 한다. 당시 죽간에 쓰던 것은 붓이 아닌 죽정(竹挺)이란 것으로 옻[漆]을 묻혀 썼다. 그래서 그 문자의 획이 마치 올챙이 모양과 같다 하여 죽첩과두문자(竹牒??文字)라고 하였다. 공자나 맹자가 쓴 글씨도 모두 이 죽간칠서(竹簡漆書)였다. 견백(絹帛)이란 천(명주)은 종이보다 다소 먼저 발명되었다. 죽간시대에
이미 명주에 글씨를 썼으며, 이 글씨는 붉은 단서(丹書:붉은 광석이나
돌가루를 반죽하여 그것을 붓에 묻혀 쓴 글씨) 아니면 검은 묵서(墨書)였다.
이때 묵서의 원료는 자연산 석날(石靭)이라는 일종의 광물이었다. 전한(前漢)시대에도 오늘날과 같은 먹은 만들지 못한 듯, 당시에
쓰였던 얇고 편편한 벼루와 마묵구(磨墨具)가 낙랑채협총(樂浪彩瑩塚),
그 밖의 한대(漢代)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25∼220년 후한(後漢)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오늘과 같은 먹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것은 종이의 발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국의 제묵 연혁을 살펴보면, 고대부터 먹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위만·낙랑시대에 중국의 것을 본받은 것이 사실인 듯하며, 신라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정품(精品)의 먹이 생산되었다. 신라의 양가(楊家)·무가(武家)의 먹은 모두 송연묵으로서 그 품격(品格)이나 질이 매우 좋았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조선묵(朝鮮墨)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일본에서도 먹은 매우 귀하게 여겼으며, 그들이 먹을 처음으로 만든 것은 고구려의 담징(曇徵)이 제지법과 제묵법을 610년에 전해준 데서 비롯되었다. 일본인 자신들도 이 사실을 시인하고 있으며, 이 밖에도 신라의 먹을 수입하여 매우 소중히 여겼다 한다. 종이:짐승의 가죽을 부드럽게 하여 만든 양피지(羊皮紙:parchment),
대나무나 나무를 얇게 깎아서 만든 것과 같은 것들은 모양과 용도가
같아도 종이라고 할 수 없다. 종이는 크게 한지(韓紙)와 양지(洋紙)로 나누며, 한지는 수록지(手질紙)와
기계지(機械紙)로, 양지는 종이(좁은 뜻의)와 판지(板紙)로 다시 나눈다.양지의
주된 원료는 목재펄프이며, 한지는 닥·삼·마 등의 인피섬유(靭皮纖維)를
원료로 하여 사람의 힘으로 제조되었으나, 근래에 와서 목재펄프를 섞어서
기계를 사용하여 만들기도 한다. 벼루:간다는 뜻에서 '硏'자를 동의자로 쓴다. 대개는 돌로
만들지만 와연(瓦硯), 도연(陶硯)도 있고 옥·유리·비취·수정
등 보석류라든가 금·은·동·철·목(木)·죽(竹)
등으로도 만든다. 형태는 직사각형·사각형·원형·타원형·풍자(風字)형
등이 있다. |
■ 문외한 門外漢
[문
문/바깥 외/사내 한]
☞어떤 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거나 관계가 없는 사람. |
■ 문일지십 聞一知十
[들을
문/한 일/알 지/열 십]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안다. 매우 총명함. |
■ 문전성시 門前成市
[문
문/앞 전/이룰 성/장 시]
☞문 앞에서 시장이 이루어진다. 권세가나 부자집 문앞은 방문객들로
붐빈다.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집 문 앞이 시장을 이루다시피 함. |
■ 문전작라 門前雀羅
[문 문/앞 전/참새 작/벌일 라]
☞문 앞에 새그물을 친다는 뜻으로, 권세를 잃거나 빈천(貧賤)해지면
문 앞 (밖)에 새그물을 쳐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방문객의 발길이 끊어진다는
말.
一死一生 卽知交情 일사일생 즉지교정 한 번 가난하고 한 번 부함에 곧 사귐의 태도를 알며 一貧一富 卽知交態 일빈일부 즉지교태 한 번 귀하고 한 번 천함에 곧 사귐의 정은 나타나네 一貴一賤 卽見交情 일귀일천 즉현교정 |
■ 물아일체 物我一體
[사물 물/나 아/한 일/몸 체]
☞외물(外物)과 자아, 객관과 주관, 또는 물질계와 정신계가 어울려
하나가 됨. |
■ 물외한인 物外閑人
[만물
물/바깥 외/한가할 한/사람 인]
☞세상의 시끄러움에서 벗어나 한가롭게 지내는 사람. |
■ 미망인 未亡人
[아닐
미/죽을 망/사람 인]
☞남편이 죽고 홀로 사는 여인. |
■ 미봉책 彌縫策
[꿰맬
미/꿰맬 봉/꾀 책]
☞꿰매어 깁는 계책. 임시로 꾸며
대어 눈가림만 하는
일시적인 대책. [예문] |
■ 미생지신 尾生之信
[꼬리
미/날 생/어조사 지/믿을 신]
☞미생의
신의. 우직(愚直)하게 약속만을 굳게 지킴./어리석고 고지식하여 융통성이
없음=抱柱不放, 抱柱之信 [참고1]장자는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소인(小人)과 군자(君子)에 대하여 <장자>盜蹠篇에서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 .... 소인은 재물을 따르고, 군자는 이름을 따르는 것이다. 그 정(情)을 변하고 그 성(性)을 바꾸는 까닭(對象= 곧 이름과 이익)은 다르지만 그 할 일(本性을 따름)을 버리고 그 하지 않을 일(外物을 따름)을 따르는 데 있어서는 곧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옛말에도 소인이 되지 말라.(이익을 탐하지 말라) 그래서 본성으로 돌아가 너의 하늘(자연)을 따르라. 군자가 되지 말라.(이름을 구하지 말라) 그래서 하늘의 이치를 따르라. 小人殉財,君子殉名. 其所以變其情,易其性,則異矣.,乃至於棄其所爲而殉其所不爲,則一也.?? 故曰,无爲小人,反殉而天.,无爲君子,從天之理. .... 비간(比干)은 심장을 찢기었고, 오자서(伍子胥)는 눈알이 도려내졌으니,
이것은 충(忠) 때문에 일어난 재화(災禍)이다. 직궁(直躬=그의 아버지가
염소를 훔쳤을 때에 증인을 섰다가 죽었음))은 부친의 도둑질을 증언하고,
미생(尾生)이 물에 빠져 죽은 것은 신(信) 때문에 생긴 우환이다(直躬證父,
尾生溺死, 信之患也). 장자는 도척의 입을 통해서 미생의 이야기를 하였는데,“이런 자는 책형(?形 - 기둥에 결박하여 세우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형벌)된 개, 물에 쓸린 돼지, 깨어진 사발을 한 손에 들고 걸식하는 거지와 같으며 사소한 명목에 끌려 진짜 귀중힌 목숨을 소홀히 하는 자이며 참다운 삶의 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놈이니라.”하고, 그 어리석음을 규탄하면서 이는 신의에 얽매인 데서 오는 비극이라 하였다. [참고2]전국시대 종횡가로 유명한 소진(蘇秦)은 燕나라 소왕을 說破할 때 <신의이는 사람의 본보기>로 미생을 예로 들었다. <史記> 蘇秦列傳 [원문]尾生與女子期于梁下,女子不來,水至不去,抱梁柱而死.无異於책犬流豕操瓢而乞者,皆離名輕死,不念本養壽命者也.'''''尾生溺死,信之患也<사기> 蘇秦曰 : "孝如曾參, 義不離其親一宿於外,王又安能使之步行千里而事弱 燕之危王哉? 廉如伯夷, 義不爲孤竹君之嗣, 不肯爲武王臣,不受封侯而餓死首陽山下. 有廉如此, 王又安能使之步行千里而行進取於<齊>哉? 信如尾生,與女子期於<梁>下, 女子不來, 水至不去, 抱柱而死. 有信如此, 王又安能使之步行千里 齊之彊兵哉? 臣所謂以忠信得罪於上者也."<장자> |
■ 미증유 未曾有
[아닐
미/일찍이 증/있을 유]
☞지금까지 아직 한 번도 있어 본 적이 없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