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침안면 高枕安眠
[높을 고/베개 침/편안할 안/잘 면]

☞베개를 높이 하여 편히 잘 잔다는 뜻. 근심 없이 편히 잘 잠. 안심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함.
[동]고침이와(高枕而臥).

[출전]『戰國策』〈魏策 哀王〉, 『史記』〈張儀列傳〉
[내용] 전국 시대,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는 종횡가(縱橫家)로서 유명한데 소진은 합종(合縱), 장의는 연형(連衡)을 주장했다. 합종이란 진(秦)나라 이외의 여섯 나라, 곧 한(韓) 위(魏) 제(齊) 초(楚)가 동맹하여 진나라에 대항하는 것이며, 연횡이란 여섯 나라가 각각 진나라와 손잡는 것이지만 실은 진나라에 복종하는 것이었다.
 
 소진보다 악랄했던 장의는 진나라의 무력을 배경으로 이웃 나라를 압박했다. 진나라 혜문왕(惠文王) 10년(B.C. 328)에는 장의 자신이 진나라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를 침략했다. 그 후 위나라의 재상이 된 장의는 진나라를 위해 위나라 애왕(哀王)에게 합종을 탈퇴하고 연횡에 가담할 것을 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진나라는 본보기로 한나라를 공격하고 8만에 이르는 군사를 죽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애왕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장의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애왕에게 말했다. "전하, 만약 진나라를 섬기게 되면 초나라나 한나라가 쳐들어오는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초나라와 한나라로부터의 화만 없다면 전하께서는 '베개를 높이 하여 편히 잘 주무실 수 있사옵고[高枕安眠]' 나라도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이옵니다." 애왕은 결국 진나라와 화목하고 합종을 탈퇘했다. 장의는 이 일을 시작으로 나머지 다섯 나라를 차례로 방문, 설득하여 마침내 주(周)나라 난왕( 王) 4년(B.C. 311)에 연횡을 성립시켰다

[내용] 此臣之所以爲大王患也. 爲大王計, 莫如事秦, 事秦, 則楚,韓必不敢動; 無楚,韓之患, 則大王高枕而臥, 國必無憂矣<전국책(戰國策)>

爲大王計, 莫如事<秦>. 事<秦>則<楚>.<韓>必不敢動 ; 無<楚>.<韓>之患,則大王高枕而臥,國必無憂矣.
<사기(史記)장의열전(張儀列傳) >

[참고]고침단명(高枕短命)--높은 베게가 수명을 단축시킨다.

■ 고황지질 膏肓之疾
[염통밑 고/명치끝 황/어조사 지/ 병 질]

☞고칠 수 없이 깊이 든 병.
**膏 : 心臟(심장)의 아래. : 橫隔膜(회경막)과 心臟의 사이.

[내용] 옛날 중국 진후(晉候)가 병을 얻어, 秦나라의 명의(名醫)를 청했더니, 꿈에 병이 든 두 소년으로 나타나서 한 놈이「그는 명의니까 어디로 숨을까」라고 말하니 또 한놈이 답하기를「황의 위, 고의 아래로 들어가면 어쩌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의원이 와 보고 병은 이미 황의 위, 고의 아래로 들어갔기 때문에 고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참고1]천석고황 泉石膏(자연에 대한 깊은 사랑)

1. 명종 때, 이황 연시조 <도산십이곡> 12수 중 제1곡
이런들 엇더하며 져런들 엇더하료
초야우생(草野愚生)이 이러타 엇더하료
하믈 며 천석고황(泉石膏황)을 곳쳐 무슴하리.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랴? 시골에 파묻혀 있는 어리석은 사람이 이렇다고(공명이나 시비를 떠나 살아가는 생활) 어떠하랴? 더구나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 고질병처럼 된 버릇을 고쳐서 무엇하랴?

2. 정철 가사 <관동별곡> 제1행
강호(江湖)에 병이 깁퍼 죽림(竹林)의 누엇더니, 관동(關東) 팔백리에 방면(方面)을 맛디시니, 어와 성은(聖恩)이야 가디록 망극하다.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치지 못할 병처럼 되어(세상 일을 잊고), 은거지인 창평에서 한가로이 지내고 있었는데, (임금께서) 800리나 되는 강원도 관찰사의 직분을 맡기시니, 임금님의 은혜야말로 갈수록 그지없다.

[참고2]相思病(상사병)-- 중국 춘추시대 송나라 강왕은 포악하고 음란하여 미인을 탐하는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어느 날 우연히 절세미인인 시종 한빙의 아내 하씨를 발견하고는 강제로 후궁을 삼았다. 그후 아내를 빼앗긴 한빙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하자, 하씨는“시신을 한빙과 합장해 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격노한 강왕은 무덤을 서로 보이게는 하되 멀리 떨어지게 만들었으나 밤 사이에 두 그루의 노나무가 각각 두 무덤 끝에서 나더니 열흘이 못되 아름들이가 되엇다. 위로는 가지가 서로 얽히고 아래로는 뿌리가 맞닿았다. 그야말로 뜨거운 만남의 표현이었다. 나무 위에는 한 쌍의 새가 앉아 서로 목을 안고 슬피 울어 사람을 애처롭게 만들었다.

 이 새를 한빙 부부의 넋이라 여겨, 그 나무를 상사수라고 했는데, 相思病이란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되었고,새는 원앙새라고 하였다.

고희 古稀
[옛 고 / 드물 희]

☞70세(인생70이 예로부터 드물었다)
[출전] 두보(杜甫)의 『곡강(曲江)二首』
[내용]

    朝回日日典春衣  조회일일전춘의
    每日江頭盡醉歸  매일강두진취귀
    酒債尋常行處有 주채심상항처유
    人生七十古來稀 인생칠십고래희
    穿花蝶深深見 천화협접심심견
    點水蜻蜓款款飛  점수청정관관비
    傳語風光共流轉 전어풍광공류전
    暫時相賞莫相違 잠시상상막상위

    조회에서 돌아오면 날마다 봄옷을 저당잡혀
    날마다 곡강에서 만취하여 돌아온다.
    몇푼 안되는 술빚은 가는 곳마다 있기 마련이지만
    인생살이 칠십년은 예부터 드문 일이라네.
    꽃 사이를 맴도는 호랑나비는 보이다 말다 하고
    강물 위를 스치는 물잠자리는 유유히 난다.
    봄 경치여! 우리 모두 어울려
    잠시나마 서로 어기지 말고 賞春의 기쁨 나누자.

[註]朝回 조회에서 돌아옴./ 典春衣 봄 옷을 저당 잡힘/. 江頭 강기슭./ 盡醉歸 만취해서 돌아옴/ 尋常 尋(심)과 常(상)은 길이를 뜻하는 단위로 각기 8자, 16자를 뜻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지만 옛날에는 그리 길지 않다는 뜻으로 인식했다.

 미미하고 보잘 것 없음/ 穿花 꽃 사이를 뚫고 다니다/蝶 호랑나비/. 深深見 때로 숨고 때론 나타나는 모양/ 蜻蜓 물잠자리/.款款 유유한 모습/ 風光 봄 경치/. 共 다 함께, 지는 꽃, 호랑나비, 물잠자리, 시인 모두를 가리/ 流轉 빙빙 돌다/相賞 봄 경치와 서로 융화되어 상춘의 기쁨을 누림/ 莫相違 서로 어기지 말자.

[참고]이 詩는 두보가 마흔 일곱 살 때 지은 것이다. 李白(이백)과 더불어 唐詩壇(당시단) 의 쌍벽을 이룬 두보는 나이 47세가 되어서야 左拾遺(좌습유)라는 벼슬자리에 앉아 보았다.

 그러나 어지러운 政局(정국)과 부패한 관료사회에 실망한 두보는 관직생활보다 詩作(시작)에 더 마음을 두었으며 매일같이 답답한 가슴을 달래기 위해 술이나 마시면서 아름다운 자연을 상대로 시간을 보냈다.

曲江은 수도장안 중심지에 있는 유명한 연못 이름으로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했으며, 특히 봄이면 꽃을 찾 는 사람들로 붐비었다고 한다. 曲江(곡강)가에서 1년간 머물며 몇 편의 시를 남겼 는데 曲江이란 七言律詩(칠언율시) 두 편도 그 때 지은 것이다. 두번째 작품에 '古稀'가 나온다.

 시의 뜻은, 요즘은 조정에서 돌아오면 매일 곡강가로 가서 옷을 잡 히고 마냥 술이 취해 돌아오곤 한다. 술꾼이 술 빚을 지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일 로 내가 가는 술집마다 외상값이 밀려 있다. 하지만 내가 살면 몇 해나 더 살겠느 냐, 예부터 말하 기를 사람은 七十을 살기가 어렵다고 하지 않았더냐 꽃밭사이를 깊숙이 누비며 지나가는 호랑나비도 제철을 만난 듯 즐겁게 보이고, 날개를 물에 적시며, 날아 다니는 잠자리도 제사상을 만난 듯 기운 차 보이기만 한다. 나는 이 약동하는 대자연의 풍광과 소리 없는 말을 주고받는다. 우리 함께 자연과 더불어 흘러가면서 잠시나마 서로 위로하며 즐겨보자 꾸나 하고 말이다.

[해설]「인생칠십고래 희」란 말은 항간에 전해 내려오는 말을 그대로 두보가 시에 옮긴 것이라고도 한 다. 어쨌든 이 말은 두보의 시로 인해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에서 古稀라는 말이 나왔지만 작자 자신은 고희와는 거리가 먼 59세로 생을 마감했다

[참고1] 연령(年齡)을 나타내는 漢字語
지학(志學) : 공자는『논어』에서, 15세가 되어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한 데서 나온 말. 15세를 일컬음.
약관(弱冠) : 남자 나이 20세를 일컬음.
이립(而立) : 공자가『논어』에서, 30세가 되어 인생관이 섰다고 한 데서 나온 말. 30세를 일컬 음.
불혹(不惑) : 공자가『논어』에서, 40세가 되어 사물의 이치에 의문나는 점이 없었다고 한 데서 나온 말. 40세를 일컬음.
지명(知命) : 공자가『논어』에서, 50세가 되어 천명(天命)을 알았다고 한 데서 온 말. 50세를 일컬음.
이순(耳順) : 공자가『논어』에서, 60세가 되어 남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한 데 서 나온 말. 60세를 일컬음.
화갑(華甲) :「화(華)」자는 십(十)이 여섯 개에다 일(一)이 하나 있으므로 61세를 나타내며, 회 갑(回甲) 또는 환갑(還甲)이라고도 한다. 61세를 일컬음.
진갑(進甲) : 환갑보다 한 해 더 나아간 해란 뜻이다. 62세를 일컬음.
고희(古稀) : 70세를 일컬음.
종심(從心) : 공자가『논어』에서, 70세가 되어 뜻대로 행하여도 도(道)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한 데서 나온 말. 70세를 일컬음.(從心所欲不踰矩)
희수(喜壽) :「喜(희) 자를 초서로 쓰면 일곱 칠(七) 위에 하나, 아래에 두 개로 모두 세 개가 쓰이므로 喜壽는‘七 + 七’세 즉, 77세를 일컬음.
산수(傘壽) :「산(傘) 자는 초서로 쓰면 여덟 팔(八) 아래에 열 십(十)이 들어가 있으므로‘八 + 十’세 즉, 80세를 일컬음.
미수(米壽) :「미(米)」자를 분해하면‘八十八’이 되기 때문에 米壽는 88세를 일컬음.
졸수(卒壽)
:졸(卒)」을 초서로 쓰면 九와 十이 합쳐진 것과 같이 보여 卒壽는‘九十’세, 즉 90세.
백수(白壽) :「백(百)」에서 일(一)을 빼면「백(白)」즉 百에서 하나를 빼면 99세가 된다.


[참고2] : 결혼기념일(結婚記念日)을 나타내는 漢字語

    紙婚式(지혼식) : 1주년        
    藁婚式(고혼식) : 2주년     
    糖菓婚式(당과혼식) : 3주년             
    革婚式(혁혼식) : 4주년        
    木婚式(목혼식) : 5주년        
    花婚式(화혼식) : 6주년       
    電氣器具婚式(전기기구혼식) : 8주년
    陶器婚式(도기혼식) : 9주년
    錫婚式(석혼식) : 10주년
    鋼鐵婚式(강철혼식) : 11주년
    麻(絹)婚式(마혼식) : 12주년
    象牙婚式(상아혼식) : 14주년
    銅婚式(동혼식) : 15주년
    磁器婚式(자기혼식) : 20주년
    銀婚式(은혼식) : 25주년
    眞珠婚式(진주혼식) : 30주년
    珊瑚婚式(산호혼식) : 35주년
    碧玉婚式(벽옥혼식) : 40주년
    紅玉婚式(홍옥혼식) : 45주년
    金婚式(금혼식) : 50주년
    回婚式(회혼식) : 60주년
    金剛石婚式(금강석혼식) : 75주년

■ 곡고화과 曲高和寡
[굽을 곡 / 높을 고/화할 화 /적을 과]

☞곡이 높으면 화답하는 사람이 적다, 사람의 재능이 너무 높으면 따르는 무리들이 더욱 적음

[내용]춘추 전국시대 말엽, 굴원(屈原)과 더불어 대표적인 남방시인으로 손꼽히던 송옥(宋玉)의 문장은 꽤 유명하였다.

 그러나 그의 문장은 난해하여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으며, 그의 글을 칭찬하는 사람도 드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초왕(楚王)은 송옥에게 그 연유를 물어보았다.  "대체 무엇 때문에 경(卿)의 문장을 따르는 사람이 없는 것이오?" 

 송옥은 초왕의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가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길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아주 쉬운 통속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위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여 따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 조금 수준이 있는 노래를 부르자 그를 따라 노래 부르는 사람이 훨씬 적었습니다.  다시 더 어려운 노래를 부르자, 불과 십여 명만이 따라 불렀습니다. 나중에 아주 어려운 노래를 부르자 두세 명만이 따라 할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봉황은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구름 위까지 오르는데, 동네 울타리를 날아다니는 참새가 어찌 하늘의 높음을 알겠으며, 곤(鯤)이라는 큰 물고기를 어항 속의 작은 물고기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는 새 가운데만 봉황이 있고, 물고기 중에만 곤이 있는 것이 아니고 선비 중에도 이런 경우가 있지 않겠습니까?" 
 
초왕은 송옥의 말을 듣고 느낀 바가 있었다.

■ 곡돌사신 曲突徙薪
[굽을 곡 / 높을 고/화할 화 /적을 과]

☞굴뚝을 구부리고 굴뚝 가까이에 있는 땔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기다.  화근을 미리 치움으로써 재앙을 미연에 방지함. 일의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된다 

[출전]『說苑』
[내용]길 가던 어떤 나그네가 한 집을 찾아 들어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되었다.  나그네는 우연히 방밖을 내다보다가 그 집의 굴뚝이 너무 곧게 세워져 있어 이따금 불길이 새어 나오고 있는 걸 보게 되었다. 게다가 굴뚝 옆에는 땔 나무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걸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나그네는 주인에게 이렇게 충고해 주었다.  "큰일 나겠소이다. 얼른 굴뚝을 구부리고 땔나무도 멀리 옮겨 놓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불이 날지도 모르오"  그러나 주인은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뒤 그 집에 불이 났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 주인을 구해내고 큰 피해 없이 불을 끌 수 있었다. 

주인은 잔치를 베풀었다.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이웃 사람들의 노고에 대한 보답이었다. 손님들의 좌석도 불을 끌 때 힘쓴 정도에 따라 상석(上席)부터 차례로 배치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처음에 굴뚝을 고치고 땔나무를 치우라고 말해준 나그네의 공로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잔치판이 한창 무르익어 갈 때쯤 어떤 사람이 시 한 수를 썼는데 두 구절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굴뚝을 구부리고 땔나무를 옮기라고 권고한 사람의 은혜는 모르고 
불에 덴 사람만 귀빈 대접을 받는구나[曲突徙薪無恩澤 焦頭爛額是上賓]  

■ 곡학아세 曲學阿世
[굽을 곡 / 배울 학 / 아첨할 아 / 세상 세]

☞학문을 왜곡하여 세상에 아첨한다. 자신의 소신이나 철학을 굽혀 권세나 시세에 아첨함.
[출전]『史記』
[내용]漢나라 경제(景帝)때 齊나라 사람 원고생(轅固生)은 90세의 늙은 신하였으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두려워하지 않고 직언을 하는 강직한 성격으로 인하여 헐뜯는 자들이 많았다.

 또한 그와 함께 등용된 소장학자 공손홍(公孫弘)도 원고생이라는 늙은 신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원고생은 공손홍에게 태연한 자세로 이르기를,“요즘 學의 도는 어지러워지고 속설이 유행하고 있네. 이대로 두면 유서 깊은 학의 전통은 마침내 사설(邪說)로 말미암아 그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네.

 그대는 다행히 젊고 好學의 선비라고 들었네. 부디 올바른 학을 열심히 배워 세상을 넓히도록 노력하게. 절대로 자기가 옳다고 믿는 학설을 굽히어 세상의 속물들에게 아첨하지 않기를 바라네.”공손홍은 원고의 훌륭한 임품과 학식에 감복하여 자신의 무례함을 사과하고 제자가 되었다. 당시 이름 있는 시인들은 거의 원고의 제자였다고 한다

[원문]<竇太后>好{老子}書, 召<轅固生>問{老子}書.<固>曰: 此是家人言耳. 太后怒曰: 安得司空城旦書乎? 乃使<固>入圈刺豕.  <景帝>知太后怒而<固>直言無罪, 乃假<固>利兵, 下圈刺豕, 正中其心, 一刺,  豕應手而倒. 太后默然, 無以復罪, 罷之. 居頃之, <景帝>以<固>爲廉直, 拜爲  <淸河王>太傅. 久之, 病免. 今上初卽位, 復以賢良徵<固>. 諸諛儒多疾毁<固>,曰 <固>老. 罷歸之. 時<固>已九十餘矣. <固>之徵也, <薛>人<公孫弘>亦徵,側目而視<固>. <固>曰: <公孫子>, 務正學以言, 無曲學以阿世! 自是之後,  <齊>言{詩}皆本<轅固生>也. 諸<齊>人以{詩}顯貴, 皆<固>之弟子也. 

**歪曲(왜곡).阿附(아부).阿諂(아첨)
**淸廉潔白(청렴결백) : 마음이나 행동이 깨끗하고 허울과 재물의 욕심이 없다.

[예문]
▷ 정거장까지 끌어다 주고, 그 깜짝 놀란 일 원 오십 전을 정말 제 손에 쥠에, 제 말마따나 십 리나 되는 길을 비를 맞아가며 질퍽러리고 온 생각은 아니하고, 거저나 얻은 듯이 고마웠다. 졸부나 된 듯이 기뻤다. 제 자식뻘밖에 안 되는 어린 손님에게 몇 번 허리를 굽히며, "안녕히 다녀옵시오"라고 깍듯이 재우쳤다.-- ≪현진건,'운수 좋은 날'≫ 中에서

▷ 얼그나저나 총장들을 날파리 잡듯 해 버리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학자라는 것들이 그 자리를 냉큼냉큼 차지하고 앉는 꼴이야. 지식인이란 것들이 아무 베알도 없이 허겁지겁 그 꼴들을 하니까 독재자가 더욱 기고만장해지는거야.지금까지 이 정권이 제대한 군바리 천국이라고 하지만 막상 따지고 보면 여기에 빌붙은 지식인들 숫자가 더 많다는 걸 알아야 해. 결국 지식인이란 것들이 권력에 기생해 가면서 이 나라 다 망쳐먹고 있는 거야≪조정래 '한강'≫中에서

▷ 상아탑이 나쁜 것이 아니라, 진리를 탐구해야 할 상아 탑이 제 구실을 옳게 다하지 못하는 것이 탈이다. 학문에 진리 탐구 이외의 다른 목적이 섣불리 앞장을 설 때, 그 학문은 자유를 잃고 왜곡(歪曲)될 염려조차 있다. 학문을 악용하기 때문에 오히려 좋지 못한 일을 하는 경우가 얼마 나 많은가? <학문의 목적>

▷ 최근 신문지면을 통해 소설가 이문열씨와 이른바 곡학아세(曲學阿世) 공방을 벌였던 민주당 추미애 의원이 25일 "이문열씨의 글에서는 역사와 정의를 찾을 수 없다"고 비판,논쟁이 확산되고 있다.<한국경제>

■ 골계지웅 滑稽之雄
[익살스러울 골/헤아릴 계/어조사 지/수컷 웅]

☞천하에 제일 가는 슬기로운 사람.≒麒麟兒. 蓋世之世

■ 골육상쟁 骨肉相爭
[뼈 골/고기 육/서로 상/다툴 쟁]

☞뼈와 살이 서로 다툼. 같은 혈족끼리 서로 다툼.
[동] 同族相殘(동족상잔) /자두연기 煮豆燃萁
[참고]조조는 훌륭한 무장이자 보기 드문 문학 애호가였다. 동한말 실세가 되어 전권을 휘두르자 그의 문하에는 시인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 曹丕(조비)는 후에 漢(한)을 무너뜨리고 魏(위)를 세워 삼국시대를 열게 된다.그도 아버지처럼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중국 최초로 문학비평을 시도했는가 하면 최초로 7언시를 지었다. 둘째 아들 曹植(조식)도 문학과 무예에서는 형 못지 않았다. 조조는 그런 조식이 더 맘에 들었던지 그를 편애했다.

 조비의 눈에는 동생이 눈엣가시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후에 조조가 죽고 조비가 위나라를 세우니 이가 文帝(문제)다.하루는 조식을 해칠 생각으로 말했다. "내가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시 한 수를 지어라. 그렇지 않으면 엄벌을 내리겠다. 조식은 골육상쟁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의 문학적 재능은 이 때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즉석에서 시를 지었다.

    煮豆燃豆萁 자두연두기
    豆在釜中泣 두재부중읍
    是同根本生 시동근본생
    相煎何太急 상전하대급

    콩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             
    가마솥 속에 있는 콩이 우는구나            
    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어찌하여 이다지도 급히 삶아 대는가      

이 시를 들은 문제는 마침내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고 한다. 이때 조식의 나이 열 살이었다. 이후 사람들은 형제간에 서로 다투는 것을 두고는 흔히 이 고사를 인용하였다. 그리고 아주 뛰어난 문학적 재능이 있는 사람은 칠보지재(七步之才)라 불렀으며, 뛰어난 문학 작품을 칠보시라 하였다.

[예문]태조 이성계가 아들 방원의 골육상쟁으로 인하여 함흥이궁으로 행하던 중 심화가 치밀고 노기가 동등하여 조갈이 심히 날 때 차고 맑은 샘물 한 그릇을 진상하였다하여 '진상한 샘 물', '임금님이 잡수신 우물'이라하여 그 물을 '어수물'이라 하고 마을 이름도 어수동이라 전하여 왔다. 이곳 사람들의 주선으로 어수정에다 팔각으로 정자를 짓고 어수정이라하여 기념하고 있다.

■ 공문십철 孔門十哲
[성씨 공/문하 문/열 십/밝을 철]

☞공자의 문인 중 학덕이 뛰어난 10명의 뛰어난 제자.≒사과십철 四科十哲
곧, 안회, 민자건, 염백우, 중궁, 재아, 자공, 염유, 자로(子路), 자유(子游), 자하(子夏)
[출전]≪논어-선진편≫

[내용]공자가 진채(陳蔡)의 들판에서 위난을 당하였을 때 함께 있던 제자들 10명의 이름을 들었다. 그는 덕행(德行)에는 안연(顔淵)·민자건(閔子騫)·염백우(?伯牛)·중궁(仲弓), 언어에는 재아(宰我)·자공(子貢), 정사(政事)에는 염유(?有)·계로(季路), 문학에는 자유(子游) ·자하(子夏)가 뛰어나다고 하였다. 또 여기에 나오는 덕행·언어·정사·문학을 사과(四科)라고 한다.<네이버백과>  

■ 공수래공수거 空手來空手去
[빌 공/손 수/올 래/빌 공/손 수/갈 거]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돌아간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고 죽을 때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 것.

    空手來空手去是人生 공수래공수거시인생
    生從何處來 생종하처래
    死向何處去 사향하처거
    生也一片浮雲起 생야일편부운기
    死也一片浮雲滅 사야일편부운멸
    浮雲自體本無實 부운자체본무실
    生死去來亦如然 생사거래역여연
    獨有一物常獨露 독유일물상독로
    湛然不隨於生死 담연불수어생사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여
    날 때는 어느 곳에서 왔으며,
    갈 때는 어느 곳으로 가는가
    나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인 듯하고
    죽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
    뜬 구름 자체는 본래 자체가 실이 없나니
    죽고사는 것도 역시 이와 같도다
    그러나 여기 한 물건이 항상 홀로 드러나
    담연이 생사를 따르지 않네

[예문]
▷ "부시 대통령의 직접 대화 의지와 BDA(방코델타아시아) 제재 해제와 관련된 확인된 부시 대통령의 메시지가 없는 한 '공수래 공수거'의 결과만 낳을 것"이라면서 "별로 큰 기대를 할 것이 없다"고 전망했다.<2006 연합뉴스>

▷ 청사초롱에 불밝혀라 잊었던 낭군이 다시 찾아온다. 공수래는 공수거요 놀아가면서 살아가세. 니나노 닐리리야 닐리리야 니나노. 얼사 좋아 얼시구나 좋다. 범나비는 이리저리 훨 훨 훨 꽃을 찾아서 날아든다 [태평가]

■ 공자왈맹자왈 孔子曰孟子曰

☞공자왈 맹자왈 한다. 글방 선비들이 다만 孔孟의 전적(典籍)을 읽으며 그에 하등 실천은 하지 않으면서 空理空論만 일삼음을 보고 하는 말.

[예문]
▷ 여전히 시류를 떠난 도덕군자모양 집안 곳간에 쌀이 얼마나 있는지, 지붕이 왜 새는지조차 모르고 공자왈, 맹자왈만 찾고 있다면 그 집안의 앞날이 정말 심각하지 않겠는가? <2006 대전일보>

▷ 정조 시대 선비 이옥(1760~1815). 성균관 유생 시절 '불온하고 타락한 문체를 쓰는 자'로 몰려 반성문을 써야 했던 인사다. 불온과 타락? 공자왈 맹자왈 하던 엄숙한 정통문학을 거부하고 일상에 기반한 자유로운 문장을 구사했다는 것이 속사정이었다.<2006 중앙일보>

■ 공자천주 孔子穿珠
[뚫을 천/구슬 주]

☞공자가 구슬을 꿴다는 뜻으로,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모르는 것을 묻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말. .
[동]不恥下問 불치하문
[출전]《조정사원(祖庭事苑)》
[내용]
공자(孔子)가 진(陳)나라를 지나갈 때 있었던 일이다. 그는 예전에 어떤 사람한테 구멍이 아홉 굽이나 되는 진귀한 구슬을 얻었는데, 그 구슬을 실로 꿰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써 보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문득 바느질을 하는 사람은 쉽게 꿸 수 있을 것 같아 근처의 뽕밭에서 뽕잎을 따고 있던 아낙네에게 물어보니 “차분하게 꿀을 가지고 생각해 보십시오”라고 말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공자는 나무 밑에서 돌아다니던 개미 한 마리를 붙잡아 허리를 실로 묶어 한쪽 구멍으로 밀어 넣은 뒤 반대쪽 구멍에 꿀을 발라 놓았다. 그러자 개미가 꿀 냄새를 맡고 기어 나와 힘들이지 않고 구슬에 실을 꿸 수 있었다.

■ 공전절후 空前絶後
[빌 공/앞 전/끊어질 절/뒤 후]

☞비교할 만한 것이 이전이나 이후에도 없을 것으로 생각함.
[동]前無後無(전무후무)
[예문]
▷ 그렇다고는 하여도 꼭 한 번의 첫일을 잊을 수는 없었다. 뒤에도 처음에도 없는 단 한번의 괴이한 인연! 봉평에 다니기 시작한 점은 시절의 일이었으나, 그것을 생각할 적만은 그도 산 보람을 느꼈다 ≪이효석-메밀꽃 필 무렵≫中

▷ 불사지존 백리극과 마애천불 천뢰선사는 이미 삼천 초(三千招)의 대격전을 벌였다. 그것은 실로 하늘도 땅도 경악할 공전절후의 대 혈전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싸움은 실로 막상막하였다. <무협소설>에서

■ 공중누각 空中樓閣
[빌 공/가운데 중/집 루/집 각]

☞공중에 누각을 지은 것처럼 근거가 없는 가공의 사물.≒신기루 蜃氣樓 , 沙上樓閣 (사상누각)
[예문] 
▷ 그의 들뜬 맘은 공중누각을 쌓으며 여순의 몸에다 공상의 갖은 치장을 베풀어 본다.≪한설야, 황혼≫

▷ 최후로 믿고 있던 가정이란 보루도 자기에게는 아름다운 신기루로 사라져 가는가 싶어서 구슬펐기 때문이었다.≪염상섭, 남자란 것 여자란 것≫  

■ 공즉시색 空卽是色
[빌 공/곧 즉/이 시/색 색]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참모습은 공(空)일 뿐 실체가 아니라는 말. 본성인 공(空)이 바로 색(色), 즉 만물(萬物)이라는 말. 만물의 본성인 공이 연속적인 인연에 의하여 임시로 다양한 만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출전]반야심경(般若心經) : 색즉시공(色卽是空), 색불이공(色不異空)
[예문] 
이별은 미의 창조 : 한용운 시

이별은 미(美)의 창조(創造)입니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質) 없는 황금(黃金)과 밤의 올(絲) 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없는 영원(永遠)의 생명(生命)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 감상 : 불교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역설의 논리가 숨어 있다. 짧은 시형 속에 여러 개의 비유를 동원하고 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의 세계관을 통해 이별이 있어야만이 다시 만나는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는 화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 주제 : 이별이 지닌 가치의 역설적 찬미
* 출전 : [님의 침묵](1926)  <공명철 국어교실>

■ 과공비례 過恭非禮
[지나칠 과/공손할 공/아닐 비/예도 례]

☞지나친 겸손(공손)은 도리어 실례가 됨

■ 과유불급 過猶不
[지날 과/같을 유/아니 불/미칠급]

☞지나침은 모자람과 같다. 중용(中庸)을 가리키는 말.(=過不及)
[출전] 논어』, 先進篇
[내용]자공(子貢)이 孔子에게“子張과 子夏 중 누가 현명합니까?”하고 물은 적이 있다. 어느날 자장이 공자에게,“士로서 어떻게 하면 達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공자는 도리어 자장에게 반문하기를,“그대가 말하는 達이란 무엇인가?”“제후를 섬겨도 반드시 그 이름이 높아지고, 경대부(卿大夫)의 신하가 되어도 또한 그 이름이 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聞이지 達이 아니다. 본성아 곧아 의를 좋아하고 말과 얼굴 빛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알며 신중히 생각하여 남에게 겸손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제후를 섬기거나 경대부의 신하가 되어도 그릇되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야 達이라 할 수 있다.”하고 공자는 자장의 허영심을 은근히 나무랐다.

 한편 자하에게는 이렇게 타이른 적이 있다. “군자유(君子儒)가 되고, 소인유(小人儒)가 되지 말라.”(구자유란 자신의 수양을 본의로 하는 구도자, 소인유란 지식을 얻는 일에만 급급한 학자) 이 두 사람을 비교해 달라는 자공의 말에,“자공은 지나쳤고, 자장은 미치지 못하였다.”“그러면 자장이 나은 것입니까?”“지나침은 못 미침과 같으니라(過猶不及).”

[원문]子貢問師與商也 孰賢 子曰 師也過 商也 不及 曰 然則師愈與 子曰 過猶不及

[예문]
성인도 과유불급이라 하셨잖소. 너무 깊숙이 파고 들어갈 건 없단 말이에요.≪한무숙, 어둠에 갇힌 불꽃들≫

게다가 이런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 영양 과잉의 문제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음식에서도 과유불급이란 옛말이 딱 들어 맞습니다. 부족한 듯하게 먹어야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지요. 그리고 고기보다는 잡곡과 야채를 많이 먹는 게 좋습니다.<2006 소년한국일보>

주로 음식물로 섭취된 철은 적혈구의 헤모글로빈을 생성한다. 적정량이 있으면 문제될 것이 없지만 지나칠 때가 문제다. 우리몸은 과도하게 쌓인 잉여 철분을 제거하는 능력이 없다.
<2006 매일경제>

환율이 올라 수출 가격이 하락할 때 수출량이 크게 중가해야만 수출 금액이 종전보다 더 커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수입의 경우에도 수입량이 크게 줄어야 수입 가격이 오른 효과를 상쇄하여 수입 금액이 줄어들 수 있다. 환율이 올라서 수출입 가격이 변화했는데도 수출이나 수입 물량의 반응이 미미하게 나타난다면 국제 수지는 오히려 종전보다 더 악화될 수도 있다.  

■ 과전이하 瓜田李下
[오이 과/밭 전/오얏 리/아래 하]

☞오이 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뜻으로, 의심받을 짓은 처음부터 하지 말라는 말.
[원] 과전불납리 이하부정관(瓜田不納履 李下不整冠).
[출전]『文選』樂府篇
[내용] 전국 시대인 주(周)나라 열왕(烈王) 6년(B.C. 370), 제(齊)나라 위왕(威王) 때의 일이다. 위왕이 즉위한지 9년이나 되었지만 간신 주파호(周破湖)가 국정을 제멋대로 휘둘러 왔던 탓에 나라 꼴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웠다. 그래서 이를 보다못한 후궁 우희(虞姬)가 위왕에게 아뢰었다.

"전하, 주파호는 속이 검은 사람이오니 그를 내치시고 북곽(北郭)선생과 같은 어진 선비를 등용하시오소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주파호는 우희와 북곽 선생은 전부터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고 우희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위왕은 마침내 우희를 옥에 가두고 관원에게 철저히 조사하라고 명했으나 이미 주파호에게 매수된 관원은 억지로 죄를 꾸며내려고 했다. 그러나 위왕은 그 조사 방법이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위왕이 우희를 불러 직접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전하, 신첩(臣妾)은 이제까지 한마음으로 전하를 모신 지 10년이 되었사오나 오늘날 불행히도 간신들의 모함에 빠졌나이다. 신첩의 결백은 청천 백일(靑天白日)과 같사옵니다.

 만약 신첩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오이 밭에서 신을 고쳐 신지 말고[瓜田不納履]'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李下不整冠]'고 했듯이 남에게 의심받을 일을 피하지 못했다는 점과 신첩이 옥애 갇혀 있는데도 누구 하나 변명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신첩의 부덕한 점이옵니다. 이제 신첩에게 죽음을 내리신다 해도 더 이상 변명치 않겠사오나 주파호와 같은 간신만은 내쳐 주시오소서."

 위왕은 우희의 충심어린 호소를 듣고 이제까지의 악몽에서 깨어났다. 그러자 위왕은 당장 주파호 일당을 삶아 죽이고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잡았다.

[예문]
“누구는 누구와 협력하고 있어서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등등 근거없는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방송위원회는 과전이하(瓜田李下)의 세심한 주의와 올바른 처신을 통해 이러한 소문과 오해를 해소하기 바란다. <2006 노컷뉴스>

국민에게 봉사하는 종(public servant)으로 거듭나겠다고 목청을 돋우니, 이제는 이익추구를 업으로 하는 서비스업계와 별반 차이가 없게 됐다. 짭짤하던 관행도 없애고, 과전이하(瓜田李下)의 마음가짐으로 근신하고. 자칫하다가는 한낱 봉급쟁이로 전락할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골탈태(換骨奪胎)를 위한 그 힘든 길을 기꺼이 걷겠단다.<2006 법률신문>  

■ 관도지기 貫道之器
[꿸 관/법도 도/어조사 지/그릇 기]

☞문(文)이란 도(道)를 관철하는 수단이란 의미로, 문장에서 도가 근본이요 수사(修辭)나 기교(技巧)는 말단에 해당된다는 이론.
[유사어]재도기지(載道之器)
 

[예문]
▷ 일월성신은 하늘의 문이요, 산천초목은 땅의 문이요, 시서예악은 사람의 문이다. 그런데 하늘의 문은 기로써 되고 땅의 문은 형으로써 되며, 사람의 문은 도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이란 재도지기이다.(日月星辰 天之文也 山川草木 地之文也 詩書禮樂 人之文也 然天以氣 地以形 而人則以道 故曰文者 載道之器)≪삼봉집 도은문집서≫

성현의 교훈은 육경에 실려 있으니, 육경이란 도에 들어가는 문입니다. 어찌 이것을 녹봉을 얻기 위한 도구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도가 나타난 것을 일러 문이라 하니, 문이란 도를 꿰는 그릇입니다. 어찌 이것을 문사의 자구나 꾸미는 기교라 하겠습니까?(聖賢之訓 載在六經 六經者 入道之門也 豈期以此爲干祿之具耶 道之顯者 謂之文 文者 貫道之器也 豈期以此爲雕蟲篆刻之巧耶) ≪율곡전서 습유 잡저 문무책≫

■ 관중규표 管中窺豹
[대롱 관/가운데 중/엿볼 규/표범 표]

☞대롱 속으로 표범을 엿본다는 말로 세상 물정을 알지 못하는 좁은 식견을 뜻함
[유사어]정중(저)지와(井中(底)之蛙)--우물 안 개구리.
촉견폐일(蜀犬吠日)--촉나라의 개가 해를 보고 짖는다(촉나라는 산이 높고 안개가 짙어 해를 보기가 어려웠음)
월견폐설(越犬吠雪)--월나라의 개가 눈을 보고 짖는다(월나라에는 눈이 거의 오지 않음).
尺澤之예(척택지예)-- 작은 못 속의 암고래. 식견이 매우 좁은 사람
以管窺天(이관규천)--대롱으로 하늘보기.
遼東豕(요동시)--: 요동의 어떤 사람의 집에 돼지가 새끼를 낳았는데 머리가 흰색이었다. 신 기하여 임금께 바치려고 하동(河東)에 갔는데 그곳의 돼지들이 모두 머리가 희므로 부끄러워 되돌아 왔다는 故事.
좌정관천(坐井觀天)-- 우물 안 개구리(정저지와, 井底之蛙)와 같은 좁은 견문.

통관규천(通管窺天) --대롱(管)을 통해(通) 하늘 보기(窺), 견문이 좁은 사람 비유
 

[내용]진나라의 대표적인 서예가 왕희지에게는 여러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헌지라는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왕희지의 집 뜰에서 서생들이 모여앉아 노름을 하고 있었다. 이 곳을 지나가던 헌지는 노름판을 한참 동안 보다가 패가 잘 풀리지 않는 한 아저씨 에게 이렇게 훈수를 했다. 

 

"남쪽 바람이 굳세지 못하여 형세가 불리하니 힘을 내세요." 
어린아이의 훈수에 마음이 상한 아저씨는 발끈 화를 내며 말했다. 
"대롱 속으로 표범을 엿보고 있군." 


헌지는 이 말이 자신의 시야가 좁음을 빗대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몹시 화가 나서 즉시 이렇게 반박했다. 
"멀리로는 순봉정(荀奉情)에게 부끄러워하고 가까이로는 유진장(劉眞長)에게 부끄러워 하십시오. 아버지의 친구인 유진장은 노름을 통해 환온의 배반을 알아냈습니다."  그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만일 대롱의 조그만 구멍을 통해 표범을 보게 된다면, 표범의 전체 모습을 보기는 힘들 것이다. 단지 표범의 어느 한 부분만을 보고 이것이 바로 표범이구나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 쉽다.  이렇듯 어떤 상황이나 사물을 판별함에 일부분만으로 한다면 적지 않은 실수를 하게 된다. 총체적으로 관찰하고 정리하는 일이 필요하다

■ 관포지교 管鮑之交
[대롱 관/절인 생선 포/어조사 지/사귈 교]

☞친구 사이의 매우 다정하고 허물 없는 교제.
[출전]史記』 管晏列傳

[내용] 제(齊)나라의 관중(管仲)이 포숙(鮑叔)과 함께 장사할때 이익을 많이 가져도 포숙이 나를 욕심이 많다고 여기지 않았고, 일을 도모하다가 곤궁해져도 어리석다 여기지 않았으며, 세 번 벼슬을 하였다가 세 번 쫓겨나도 못났다고 하지 않았고, 세 번 싸움에 세 번 도망갔으나 포숙은 관중을 겁장이라 여기지 않았다. 관중이 말하기를,「나를 낳아 주신 분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 준 사람은 포숙이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叔也).」라고 했다.

[원문]管仲이 曰 吾始困時에 嘗與鮑叔賈할새 分財利에 多自與어늘 鮑叔이 不以我爲貪은 知我貧也요 吾가 嘗爲鮑叔하여 謀事라가 而更窮困이어늘 鮑叔이 不以我爲愚는 知時有利不利也요 吾가 嘗三仕하여 三見逐於君이어늘 鮑叔이 不以我爲不肖는 知我不遭時요 吾가 嘗三戰三走어늘 鮑叔이 不以我爲怯은 知我有老母也요 公子糾가 敗할새 召忽은 死之하고 吾가 幽囚受辱이어늘 鮑叔이 不以我爲無恥는 知我不羞小節하고 而恥功名이 不顯於天下也라 生我者는 父母요 知我者는 鮑子也라.

[주]嘗(상)일찍이/ 賈(고)장사하다 / 與(여) 주다 / 謀(모) 꾀하다 / 更(갱) 다시- / 見(견)당하다 / 逐(축) 쫓다,몰아내다 / 肖(초) 닮다 *不肖--아버지를 닮지 못해 못나다 / 遭(조) 만나/ 怯(겁) 겁내다 / 幽(유) 그윽하다 / 囚(수) 가두다 / 恥(치) 부끄러워하다 / 羞(수) 부끄러워하다 / 顯(현)드러나다 **更生갱생 更迭 경질 三更 삼경   變更변경  更正경정 **利己이기  有利유리 便利편리  銳利예리  利益이익

[참고]춘추 시대 초엽, 제(濟)나라에 관중(?∼B.C. 645)과 포숙아라는 두 관리가 있었다. 이들은 죽마 고우(竹馬故友)로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관중이 공자(公子) 규(糾)의 측근(보좌관)으로, 포숙아가 규의 이복 동생인 소백(小白)의 측근으로 있을 때 공자의 아버지 양공(襄公)이 사촌 동생 공손무지(公孫無知)에게 시해되자(B.C. 686) 관중과 포숙아는 각각 공자와 함께 이웃 노(魯)나라와 거( )나라로 망명했다.

이듬해 공손무지가 살해되자 두 공자는 군위(君位)를 다투어 귀국을 서둘렀고 관중과 포숙아는 본의 아니게 정적이 되었다. 관중은 한때 소백을 암살하려 했으나 그가 먼저 귀국하여 환공(桓公:B.C. 685∼643)이라 일컫고 노나라에 공자 규의 처형과 아울러 관중의 압송(押送)을 요구했다. 환공이 압송된 관중을 죽이려 하자 포숙아는 이렇게 진언했다.

"전하, 제 한 나라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신(臣)으로도 충분할 것이옵니다. 하오나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시려면 관중을 기용하시오소서."

도량이 넓고 식견이 높은 환공은 신뢰하는 포숙아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중을 대부(大夫)로 중용하고 정사를 맡겼다. 이윽고 재상이 된 관중은 과연 대정치가다운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倉實則 知禮節 창름실즉 지예절'
    衣食足則 知榮辱 의식족즉 지영욕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안다
    의식이 풍족해야 영욕을 안다

고 한 관중의 유명한 정치철학이 말해 주듯, 그는 국민 경제의 안정에 입각한 덕본주의(德本主義)의 선정을 베풀어 마침내 환공으로 하여금 춘추(春秋)의 첫 패자로 군림케 하였다.

이같은 정치적인 성공은 환공의 관용과 관중의 재능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이긴 하지만 그 출발점은 역시 관중에 대한 포숙아의 변함없는 우정에 있었다.   
[유]竹馬故友(죽마고우)/,斷金之交(단금지교) /.金蘭之交(금란지교)./芝蘭之交(지란지교)/.知己之友(지기지우)./知音(지음)./刎頸之交(문경지교)./水魚之交(수어지교)./膠漆之交(교칠지교)-아교와 옻처럼 떨어질 수 없는 가까운 사이

[예문]
▷ 관포지교라고 알려졌던 두 친구의 관계가 여자 문제로 하루아침에 멀어졌다.

▷ 모르의 사진작품과 에세이에 대한 좋은 길잡이가 된다. 존 버거의 글 군데군데 진하게 배어 있는 두 일흔 노인의 관포지교는 이 책이 선사하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2006 데일리안>

[참고]

    빈교행(貧交行)---< 杜 甫 >

    飜手作雲覆手雨    번수작운복수우
    紛紛輕薄何須數    분분경박하수수
    君不見官鮑貧時交 군불견관포빈시교
    此道今人棄如土    차도금인기여토

    손 뒤집으면 구름 일게 하고 손엎으면 비 오게 하니
    수없이 어지러운 경박함을 어찌 따질 필요 있겠는가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관중과 포숙의 가난할 때의 사귐을
    이 도리를 지금 사람들은 흙 버리듯 하고있네



[풀이]빈교행(貧交行)의 행(行)은 '노래'와 같다. 따라서 이 제목은 가난한 떄의 교제에 대한 노래라는 뜻이다. 작가가 장안(長安)에서 빈한한 생활을 하면서 사관(仕官)을 구하던 시절의 작품으로 보인다.

 작가의 열망(熱望)에도 불구, 조정(朝廷) 사람들은 그에게 냉담해서 쉽사리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냉담한 세상에 노여움과 절망을 느낀 그가 이 시로써 어느 특정한 개인에 대한 분노를 나타낸 것이란 설도 있다.

■ 괄목상대 刮目相對
[눈비빌 괄/눈 목/서로 상/기다릴 대]

☞눈을 비비고 보며 상대를 대한다. 한동안 못 본 사이에 상대방의 학식이나 재주가 몰라보게 달라짐. 몰라보게 달라짐, 눈에 띄게 달라짐

[출전]『삼국지(三國志) 』오지(吳志) 여몽전주(呂蒙傳注)

[내용] 오(吳)나라 왕 손권(孫權)에게는 부하 여몽(呂蒙)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그는 몸이 날쇄고 무술이 뛰어나 많은 전공을 세웠지만 매우 무식하였다.

 어느날 손권이 그에게 공부할 것을 권했다. 얼마 후 손권의 신하 중에서 학식이 가장 뛰어나며 여몽과 오랜 친구인 노숙(魯肅)이 찾아왔다.

 서로 이야기하던 중 여몽의 박식함에 깜짝 놀라“오늘에 이르러 학식이 영특하고 박식하니 온나라 시골 구석에 사는 어리석은 여몽이 아니구려.”라고 말하니 여몽이“선비는 헤어진지 3일이 지나면 곧 눈을 비비고 대하여야 할 정도로 달라져 있어야 한다네.”라고 대답하였다.

[원문] 至於今者 學識莫博 非復吳下 阿夢曰 士別三日 卽當刮目相對

[예문]
그는 피나는 노력의 결과 기타 연주 실력이 괄목상대했다.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대 삼십 년이 못 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하게 될 것을 나는 확언하는 바이다.≪김구, 백범일지≫

생활용품과 기초화학으로 시작한 애경은 애경백화점과 AK면세점으로 유통부문에서 선전하고 있고, 올해 항공업(제주항공)에도 진출하는 등 괄목상대할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후기에서만 5승3무2패. 전기 10위. 컵대회 꼴찌(14위)로 추락했던 것을 떠올리면 괄목상대할 성적이다. 인천이 뿜어내는 무서운 뒷심의 중심에는 톱클래스의 전략가로 꼽히는 장외룡 감독의 ‘장풍’이 있다.... <2006 스포츠서울>

■ 광일미구 曠日彌久
[빌 광/날 일/더할 미/오랠 구]

☞오랫동안 쓸데없이 오래 끌고 머물며 세월만 보낸다는 뜻. 쓸데없는 소모전 ≒광일지구(曠日持久), 광구(曠久)

[내용] 전국 시대 말엽,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 때의 일이다. 연(燕)나라의 공격을 받은 혜문왕은 제(齊)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3개 성읍(城邑)을 할양한다는 조건으로 명장 전단(田單)의 파견을 요청했다.

 전단은 일찍이 연나라의 침략군을 화우지계(火牛之計)로 격파한 명장인데 조나라의 요청에 따라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러자 조나라의 명장 조사(趙奢)는 재상 평원군(平原君)에게 항의하고 나섰다.

"아니, 조나라엔 사람이 없단 말입니까? 제게 맡겨 주신다면 당장 적을 격파해 보이겠습니다."

  평원군은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조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제나라와 연나라는 원수간이긴 합니다만 전단은 타국인 조나라를  위해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강대한 조나라는 제나라의 패업(覇業)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전단은 조나라 군사를 장악한 채 '오랫동안 쓸데없이 세월만 보낼 것입니다[曠日彌久].' 두 나라가 병력을 소모하여 피폐해지는 것을 기다리면서……."

 평원군은 조사의 의견을 묵살한 채 미리 정한 방침대로 전단에게 조나라 군사를 맡겨 연나라 침공군과 대적케 했다. 결과는 조사가 예언한 대로 두 나라는 장기전에서 병력만 소모하고 말았다.
[주] 화우지계 : 쇠뿔에 칼을 잡아매고 꼬리에 기름 바른 갈대 다발을 매단 다음 그 소떼를 적진으로 내모는 전술.

■ 광풍제월 光風霽月
[빛 광/바람 풍/갤 제/달 월]

☞시원한 바람과 맑은 달, 비 갠뒤의 바람과 달,아무거리낌이 없는 맑고 밝은 인품

[출전] 宋書 周敦滯傳
[내용] 유교(儒敎)는 북송(北宋) 중기에 주돈이(周敦滯 : 1017-1073)가 나와서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통서(通書)를 저술했고, 그 뒤에 정호(程顥)와 정이(程滯) 형제가 사서(四書 : 大學 中庸 論語 孟子)를 정하여 성도(聖道)를 밝히었으며, 주자(朱子)가 이것을 집대성(集大成)하여 형이상학(形而上學) 으로서의 경학(經學)을 수립하여 소위 송학(宋學)을 대성(大成) 시켰다고 알려지고 있다. 
 
주돈이는 옛사람의 풍도가 있으며, 정사를 베풂에는 도리를 다 밝힌 사람이라고 한다.   '연꽃은 군자다운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는 <애련설(愛蓮說)> 한 편은 글 안에 도학(道學)의 향기도 풍기지만 그의 인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소식(蘇軾)과 함께 북송(北宋) 시대의 시를 대표하는 황정견(黃庭堅 :1045-1105) 은 주돈이에 대하여 깊은 경의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의 인간성에 대하여,   "춘릉(春陵)의 주무숙(周茂叔)은 인품이 몹시 높고, 가슴속이 담박 솔직하여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다" 고 평하고 있다. 

광풍제월(光風霽月)이란 , "깨끗하게 가슴 속이 맑고 고결한 것, 또는 그런 사람"에 비유하여 사용되고 있다. 또 "세상이 잘 다스려진 일"을 뜻하기도 한다. .

■ 괘관 掛冠
[걸 괘/갓 관]

☞관직에 있는 자가 제복에 딸린 관()을 벗어 걸어 놓음. 관직을 사임함.

[출전] 후한서(後漢書) '봉맹전(蓬萌傳)'
[내용] 중국 후한()의 봉맹()이 왕망()에게 자기 아들을 살해당하자 관을 동도(:낙양)의 성문에 걸어 놓고 요동()으로 떠나갔다는 이야기,

 후한 사람 봉맹(蓬萌)은 비록 도둑을 잡는 정장(亭長)이었지만 '춘추(春秋)'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전한(前漢)의 12대 왕 애제(哀帝)가 죽고 왕망(王莽)이 평제(平帝)를 세웠지만 왕망은 평제의 어머니인 위희(衛姬)와 그 집안 식구가 도읍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또 그 일을 간한 장남 왕우(王宇) 내외를 죽였다. 

이것을 본 봉맹은 친구에게  "삼강(三綱)은 이미 끊어졌다. 지금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들에게도 재앙이 미칠 것이다."  라고 말하고 그 자리에서 갓을 벗어 동도문(東都門)에 걸고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요동(遼東)에서 숨어 지냈다. 

봉맹은 왕망이 멸망하리라는 것을 알고 머리에 기와로 만든 분을 올려 놓고 시장거리에서 큰 소리로 울면서  "아! 신(新)나라여, 신(新)나라여(왕망이 전한을 멸망시키고 세운 나라)."  라고 말하면서 거리를 지났다. 왕망이 멸망하고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즉위하자 태수(太守)가 억지로 조정에 들어오려 했으나 칙령(勅令)을 내려 응하지 않았다.

■ 교각살우 矯角殺牛
[바로잡을 교/뿔 각/죽일 살/소 우]

☞소 뿔을 바로 잡으려다 소를 죽인다. 결점이나 흠을 고치려다 수단이 지나쳐 도리어 일을 그르침.
[동] 矯枉過直(교왕과직/굽을왕/지나칠과)/小貪大失(소탐대실)
[속담] 빈대 잡으려다 초가 삼간 다 태운다.

[예문]
한나라당.국민신당 등 야권은 23일 여권의 재벌개혁정책이 무리하게 추진될 경우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밝혔다.이한동 (李漢東) 한나라당대표는 고위당직자회의에서 "재벌들이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구조조정에 나서는 것은 당연하나 김대중 (金大中) 당선자측이 너무 서두르면 교각살우 (矯角殺牛) 의 우를 범할 수 있다" 고 지적했다.<1998 중앙일보>

대통령이 언론의 보도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무언의 전제 아래 일부 시민단체의 주장에만 동조해 언론개혁을 촉구하는 것은 소를 죽이더라도 쇠뿔을 고치는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주문과 다를 바 없다. <중앙일보 김영희 칼럼>

■ 교언영색 巧言令色
[교묘할 교/말씀 언/좋을 령/빛 색]
 동영상

☞교묘한 말과 억지로 꾸민 얼굴 빛. 겉치레만 할 뿐 성실하지 못한 태도.
[동]아유구용 阿諛苟容

[출전]논어(論語)》의 학이편(學而篇),양화편(陽貨篇)

[내용]“교묘한 말과 아첨하는 얼굴을 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 적다(巧言令色鮮矣仁)”는 뜻이다. 즉, 말을 그럴 듯하게 꾸며대거나 남의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 생글생글 웃으며 남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 치고 마음씨가 착하고 진실된 사람은 적다는 뜻이다.

[예문]
이 밖의 일은 아무리 미사여구, 교언영색으로 장식해도 전부가 거짓이고 사기다.≪이병주, 지리산≫

권위주의는‘윗사람에게는 복종과 아첨을 일삼으면서 아랫사람들에게는 군림하려 하는 의식 구조와 행동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은 위계적인 사회 질서 속에서 살아왔을 뿐 아니라 해방 후에도 거의 반세기 동안 권위주의적인 정치 질서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힘있는 사람이나 윗사람에게는 복종하거나 아첨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생존 방식이고 출세를 위한 처세술이라고 여겨왔다고 생각된다.

▷ 명백한 피해자가 있는 임진왜란의 침략사례를 대륙진출로 자구수정을 한다고 해 현실의 불만이 사라지는가. 일본 정부 스스로 속죄의 대상으로 공식발표했고 유엔 인권위원회까지 보상 책임을 명백히 했던 종군위안부 문제를 교과서에서 지운다고 수만명의 여성들을 전쟁의 노리개로 삼았던 그 만행의 과거가 없던 일로 사라질 것인가.  잘못된 지난날을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미화하고 위장된 과거를 자식들에게 가르친다는 것 자체가 죄악 아닌가. <중앙일보, 권영빈 칼럼>

요즈음 학자는 우리 학문을 높일 만하다고 하지 않으며, 또 제 몸만 착하게 하려 하지 들지도 않는다. 입으로 지껄인 것과 귀로 듣기만 한 것을 주워 모아, 겉으로 말과 행동을 꾸미는 데 불과하다. 그러면서도 “나는 도리를 밝힌다.” “나는 이치를 깊이 공부한다.”고 말함으로써 한 시대의 사람들이 보고 듣는 것을 어지럽힌다.  

■ 교외별전 敎外別傳
[가르칠 교/바깥 외/다를 별/전할 전]

☞경전(經典) 바깥의 특별한 전승(傳承). 마음과 마음으로 뜻을 전함.
[동]以心傳心(이심전심) 心心相印(심심상인) 不立文字(불립문자)
백지묵서 지장보살본 원경[내용] 經典 바깥의 특별한 傳承, 언어나 문자에는 근거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본성을 뚫어보고 불경을 얻는다.(敎外別傳,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
** 直指 :‘곧바로 가리킨다.’지적이라기 보다는 직관적이며 여러 군말 없이 사실을 사실대로 토로하는 마음의 전형.

선종(禪宗)에서 말이나 문자를 쓰지 않고, 따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진리를 전하는 일. 달마(達磨)에 의해 중국에 전해진 조사선(祖師禪)에서는, 불교의 진수는 어떤 경전의 문구에도 의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직접 체험에 의해서만 전해진다고 말한다. 이는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과 함께 선의 입장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이다. 석가가 언어로써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교내(敎內)의 법이라면, 교외(敎外)의 법은 석가의 마음을 직접 다른 사람의 마음에 전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표월지(標月指: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비유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진리를 달에 비유한다면 교(敎)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으며, 이에 반해 선(禪)은 달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다. 다른 종파(宗派)가 모두 교내의 법을 가르침에 반하여, 선종에서만은 교외의 법을 주장하는 것이 가장 뚜렷한 특징이다

[참고1] 老子는 道德經에서“성(聖)을 절(絶)하고 지(智)를 버리면 민리(民利)가 백배(百倍)하리 라.”고 하여, 지식이니 학문이니 하는 것의 불필요함을 말하였다. 그러나 딱한 것은 지식이 불필요하다고 아는 것도 하나의‘앎’이요, 후세 사람들이 도덕경이라는 책을 읽음으로써 이 노자의 사상을 알 수 있게 마련이니, 노자의 말은 오히려 지(知) 자체를 반성한 지의 지라고 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자기의 무지(無知)를 아는 사람은 그 무지 조차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과 다름직도 하다고 하였거니와, 노자는 지의 불필요를 아는 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말로 표현하듯이, 지가 불필요함을 지로써 전하는 껏이라 하겟다. 결국 지(知) 이상의 것도 지를 통함으로써만 알 수 있다.

[참고2] 不立文字 敎外別傳說의 由來 우리나라 禪家의 전설은 대개 중국 선종의 설을 그대로 계승하여 오는 것으로 '禪宗系譜說'이 그러하고 '東土初祖說'이 그러하며 이제 이 '不立文字 敎外別傳說'도 그러하다.

 다른 문제는 且置하고 이 不立文字의 문제, 곧 선종에도 所依經이 있었던가 하는 문제의 발단이 된 此說의 유래를 잠시 더듬어 보기로 한다. 불교라 하는 것은 교주 釋迦牟尼佛의 敎說췱iddot;敎訓?iddot;敎示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 교설 등이라 함은 言語와 文字로 된 經과 律 外에는 따로 없는 것이며, 이러한 것 중의 어느 것을 신봉하는 것이 다름 아닌 불교의 諸宗이므로, 만약 이것들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선종에서는 經?iddot;律‥論 三藏을 所依로 하지 않고서 무엇으로써 어떠한 근거에서 自宗을 불교라 주장하는가. 선종의 견지에서는 釋迦牟尼佛이 자기의 사상을 전하는 방법에는 二種이 있으니, 그 하나는 言說에 의하는 것으로 이 방법은 鈍根劣機에 대한 방법이요, 그 둘째는 言說文字에 의하지 않고 師資가 직접 以心傳心하는 방법으로서, 이 방법은 殊勝한 근기에게 전하는 방법이다. 前者는 곧, 종교이요 후자가 곧, 선종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以心傳心 敎外別傳說의 근거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拈華微笑 敎外別傳說이다. 선종의 宗旨는 경론 等이나 기타 언설에 의하여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언설이외에 師資가 相接하여 以心傳心의 방법으로써 불타의 正法眼藏을 상전한다는 것인 바 이 기원은 벌써 교주 석존으로부터 시작되어 석존이 摩訶迦葉에게 拈華微笑의 방법으로써 정법안장을 전하신 것을, 그 후 27祖가 모두 以心傳心의 방식으로, 代代 전법을 하였다 하여, 그 純一無雜性을 敎家에 대하여 자랑한다.

 그러면 이 以心傳心說을 전하는 문헌은 과연 무엇인가. 중국 宋代 道原의 作인(서기 1004년 作) '景德傳燈錄'에는 아직, 이 설의 기록이 없다.k 此書는 구체적인 선종사로서 가장 중요한 문헌이다. 중국 선종의 初祖라 하는 達磨大師가 東來한 것은 서기 478년으로 추정되는 바, 이보다도 526년이나 後世에 저작된 이 '傳燈錄'에도 선종 別立의 근거인 拈華微笑, 以心傳心說의 記載가 없다. 이 '傳燈錄'에 의하여 저작된 宋 契嵩의 '正宗記'(1060년 이전 作)에는,

혹 말하기를 여래께서 靈山會中에서 捻華示之하시니 迦葉이 微笑하였는지라, 곧 이에 付法하셨다. 또 가로대 여래는 법을 多子塔 앞에서 대가섭에게 付하셨다 라고 하니 世는 모두 이로써 전수의 實이라 하나, 그러나 이는 아직 그 출처를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비록 稱取하나 또한 果敢히 써 審詳하지 않노나.(同書 卷1末)

라고 하여 오히려 그 설을 전적으로는 取信하지 않았다. 이에 의하여 본다면 宋代에 들어와서 비로소 이러한 전설이 점차 떠돌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 그로부터 40년 후에 著作된 '建中靖國續燈錄' 卷1에 의하면(1101년 作), "四十九年 三乘顯著, 拈花普示 微笑傳"이라 있고 또 그 후(1183년)에 저작된 '聯燈會要' 卷1에 의하면 비로소

세존이 在靈山會上하사 拈花示衆하시니 衆皆默然이나 唯迦葉이 破顔微笑하니 세존이 云하사되 吾有正法眼藏 涅槃妙心 實相無相 微妙法門하니 不立文字하고 敎外別傳하노라 하시고 付囑摩訶迦葉하시다.

라고 하여, 점차 공공연하게 나타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 拈花微笑 敎外別傳說의 근원적인 근거는 과연 무엇이었던가. 宋代 智胎의 著 '人天眼目'(1188년 作) 제5 宗門雜錄에,

王荊公 (王安石)이 佛慧泉禪師에게 問云, 禪家에 所謂 拈華는 出在何典이닛가. 泉云 藏經에도, 亦不載로다. 云曰 余頃在翰林苑하여 '大梵天王問佛決疑經' 三卷을 보고 因閱之하니 經文所載가 甚詳하더이다. 梵王이 至靈山하여 金色波羅花를 佛께 드리고 몸을 버려 床坐를 삼아 佛께 請하여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하시게 하니 세존은 登坐하사 拈花示衆하시니 人天百萬이 모두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홀로 金色頭陀가 있어 破顔微笑하니 세존이 云하되 "吾有正法眼藏 涅槃妙心, 實相無相하니 分付摩訶迦葉하노라"라고 이 經은 帝王이 事佛하여 請問하는 것을 多談하였는지라 所以로 秘藏되어 世에 듣는 자가 없었다.

라고 되어 있다. 곧 王安石 時代에는 이 '大梵天王問佛決疑經'이라는 經이 翰林苑에 있었다 하나 그러나, 이 경이 대장경 중에 편입되어 있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아무 經錄上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이 경은 위경임이 명백하고 또 따라서 拈花微笑 敎外別傳說도 후세인들에 의해  造된 일종의 망설임에 불과한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전설이  造되게 된 동기는 宋에 이르러 선종의 宗勢가 隆盛하여지니 다른 敎宗佛敎에 그 독특성을 誇張할 필요에 의하였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뿐 아니라, 선종의 28祖의 系譜說도 역시 후세에  造된 것으로 (이에 詳論의 餘裕가 없어 省略하나) 선종으로서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이러한 전설들을  造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은 達磨에 의해 禪法이 初傳된 이래 300여년간에 선이 一宗으로서 堅固한 지반을 닦아서 日就月盛하여 가는 途上에 있으므로 自宗의 系譜를 확실히 해 두어야 할 필요가 28祖說과 또 自宗의 純粹佛敎性을 표시해야 할 必要上 敎外別傳說을 구상해 내었던 것이 아닐까한다.

 특히 중국 唐代에까지 융성하였던 모든 교종들은 다 각각 그 所依의 경론이 분명하여 불교로서 행세하는데 유력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선종만이 그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 이류를 밝히기 위하는 同時에 타종의 所依經論보다도 오히려 더 유력한 근거설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扶宗的 운동은 中唐 이후 宋代의 일이었고 禪法을 初傳한 達磨大師로부터 神秀?iddot;慧能에 이르는 禪宗成立時代에 있어서는 그러한 전설이란 전연 없었던 것임에 주의해야 한다.

不立文字의 意義 중국의 圭峯 宗密의 (780-841) '中華傳心地禪門師資承襲圖'에 "然達磨西來唯傳心法 故自云我法 以心傳心 不立文字"라 하여 있고, 또 '景德傳燈錄' 楊億의 序에도 "首從於達磨 不立文字 直指心源 그러나 이러한 扶?이라 하여 문자를 不立하였다는 점에 강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들릴는지 모르나, 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以心傳心'한다는데, 그 진정한 의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 대개의 禪客들은 不立文字에 禪宗의 주안점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지 않는가 한다. 그 증거가 대개의 禪客들이 三藏을 무시해 온 것이며 문자를 경시하는 標本으로 六祖 慧能大師의 無識을들고 있다. 그러나 六祖가 경을 중시한 증거는 있을지언정 무시한 증거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이 선종의 宗旨인 바 이 三句 중 "直指人心 見性成佛"이 목적이요 不立文字는 그 목적 달성을 위한 한 수단방법이라고 보아야 한다. 宋代 睦庵 善鄕의 編, '祖庭事苑' 제5 單傳에

傳法祖師는 初以三藏敎로 兼行이러니 後에 達磨祖師는 單傳心印하여 破執顯宗하였나니 所謂 敎外別傳하여 不立文字하고 直指人心하여 見性成佛케 하였나니라. 然이나 不立文字의 失意者多하여 往往謂하되 屛去文字하고 以默坐로 爲禪하니 斯實吾門啞羊耳요 且萬法紛然하니 何止不立文字리오. 殊不知道猶如通하고 豈拘執一隅아. 故로 卽 文字하면 而文字不可得이니라 文字旣爾하니 餘法도 亦然하리니 見性成佛의 所以也니라.

라고 하여 있는 바와 같이 不立文字의 眞意는 破執顯宗하는데 있는 것이다.(이상의 모든 문헌에 모두 達磨大師부터가 不立文字를 주장한 것같이 말하고 있지만 이하에도 논증하는 바와 같이 달마는 결코 그런 문구를 사용한 일도 없을 뿐 아니라 또 문자를 경시하는 태도를 취한 일도 없었다.) 곧 불교의 근본 목적은 어떠한 宗임을 막론하고 見性成佛에 있지 아니한 宗이 없다. 경론상에도 이러한 취지가 명론되어 있는 것이지마는 중생들은 경론의 이와 같은 근본 취지는 망각하고 도리어 경론의 言說文字에만 집착하므로 이것을 破하기 위하여 不立文字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자를 屛去하고 默坐하는 것만이 선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啞羊에 불과하다. 만약 문자에 局執하는 자를 위하여 不立文字를 주장한 것이라 하면 어찌 默坐 禪의 局執은 파하지 않을 수가 있으리오. 要는 見性成佛에 있는 것이지 문자를 세우고 좌선을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일본 曹洞宗 螢山紹瑾의 語 '十種勅問奏對集'에

 問三曰, 禪家所謂不立文字 敎外別傳矣라 하나 雖然이나 一大藏經이 皆是文字요 禪家語錄도 亦是文字이어늘 若無文字하면 佛祖의 言敎가 依何하여 流布末世耶아.

師曰 文字는 是魚兎筌蹄也니 若得魚兎하면 則筌蹄는 渾是無所用也니다. 修多羅敎는 標月之指也라 若觀月하면 則指亦無所用也나 然이나 人皆認筌蹄하여 不得魚兎하고 認指頭하여 不觀月하니 故로 曰, 不立文字也니다.

라고 奏答하고 있다. 經律論이 言語文字인 것은 사실이다. 문자가 魚兎를 잡는 筌蹄와 같은 것이요, 명월을 가리키는 手指와 같은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魚兎를 잡고 명월을 보기까지에는 그 筌蹄와 手指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魚兎를 이미 잡아 마처고 명월을 이미 보아 마친 후에는 筌蹄와 手指가 무용지물로 되어 버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종교적 실천이 선이나 佛에게는 아무런 필요가 없는 것과 같이 魚兎를 已獲하고 명월을 已觀한 사람에게는 筌蹄와 手指는 필요가 없는 것이지마는 아직 魚兎를 잡지 못하고 명월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緊要不可缺의 도구인 것이다. 단 筌蹄와 手指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알고, 魚兎와 明月을 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不立文字의 경구가 또한 절대 필요한 것이다.

 곧 이러한 의미에서 不立文字를 본다면 선과 敎問에 아무런 問隔도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우리 나라 禪客 중에는 무식이나 다름이 없는 상식으로써 이상에 논증한 禪宗의 역사적인 사실을 무시하고 不立文字라 하여 불교의 교학을 만약 등한시한다면 교주 釋尊 49년간 苦口 寧의 설법에 대한 죄인이 될 뿐 아니라, 자기의 智見 啓發에도 막대한 손실을 초래할 것이다.<禪宗의 所依經에 대하여(金東華)>

[참고3]도올 『碧巖錄』 講話 제1화 양무제가 달마를 만났을 때  

■ 교자채신 敎子採薪
[가르칠 교/아들 자/캘 채/땔 나무 신]

☞자식에게 땔나무 캐오는 법을 가르치라, 무슨 일이든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근본적인 처방에 힘쓰라. 

[출전]『속맹자(續孟子)』.

[내용] 춘추시대 노나라의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루는 땔나무를 해 오라고 하면서 한마디 물어보았다.  "너는 여기서 백 보 떨어진 곳에 가서 해오겠느냐? 아니면 힘이 들더라도 백 리 떨어진 곳에 가서 해 오겠느냐?" 

말할 것도 없이 자식놈은 백 보 떨어진 곳으로 가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가까운 곳으로 가겠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 곳은 언제든지 해올 수 있다. 하지만 백 리 떨어진 곳은 누가 가져가도 되니, 그 곳의 땔감부터 가져와야 우리 집 근처의 땔감이 남아 있지 않겠니?" 아들은 아버지의 깊은 생각을 이해하고 먼 곳으로 땔나무를 하러 떠났다.

 

■ 교주고슬 膠柱鼓瑟
[아교 교/기둥 주/두드릴 고/비파 슬]

☞거문고의 기러기 발을 아교로 붙여 놓고 거문고를 탄다. 고지식하여 융통성이 전혀 없음. 또는 규칙에 얽매여 변통할 줄 모르는 사람.
[참고]雁足:기러기 발/膠着교착/琴瑟금슬/守株待兎수주대토/,刻舟求劒각주구검/尾生知信미생지신

[출전]史記』.
[내용]조나라에 조사(趙奢)라는 훌륭한 장군이 있었다. 그에게 괄(括)이라는 아들이 있어 병서를 가르쳤는데 매우 영리하여 뛰어나게 병법을 잘 알았다. 그러나 조사(趙奢)는,"전쟁이란 생사가 달린 결전이므로 이론만으로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병법을 이론적으로만 논하는 것은 장수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앞으로 괄(括)이 장수가 된다면 조 나라가 큰 변을 당할 위험이 있다."하며 부인에게 나라에서 조괄을 대장으로 삼지 않도록 말려 달라는 유언까지 했다.

 뒷날 진나라가 조나라를 침략하면서 첩자를 보내 流言蜚語를 퍼뜨렸다.
"조나라 염파 장군은 늙어서 싸움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다. 다만 진나라는 조괄이 대장이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이 流言蜚語에 빠진 조나라 왕은 염파 대신 조괄을 대장으로 임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인상여(藺相如)가 극력 반대하면서, "임금께서는 그 이름만 믿고 조괄을 대장으로 임명하려는 것은 마치 기둥[膠柱]을 아교로 붙여 두고 거문고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괄은 한갓 그의 아버지가 준 병법을 읽었 을 뿐, 때에 맞추어 변통할 줄을 모릅니다."[膠柱鼓瑟]

 그러나 임금은 그토록 신임하던 인상여의 말도 듣지 않고 조괄을 대장에 임명하였다. 조괄은 대장이 되는 그날로 병서에 있는 대로 하여 전부터 내려오는 군영들을 뜯어고치고 참모들의 의견을 듣지도 않고 자기 주장대로만 작전을 전개했다. 실전 경험이 전혀 없는 조괄은 이론만으로 작전을 감행한 끝에 40만이라는 대군(大軍)을 몽땅 죽이는 중국 역사 상 최대 최악의 참패를 가져왔다.

 거문고의 기둥을 풀로 붙여 고정해 두고 거문고를 타니 조율을 할 수 없게 되어 소리 [音]가 제대로 날 리가 없었다

[원문]後四年, <趙惠文王>卒,子<孝成王>立. 七年, <秦>與<趙>兵相距<長平>, 時<趙奢>已死, 而<藺相如>病篤, <趙>使<廉頗>將攻<秦>, <秦>數敗<趙>軍,  <趙>軍固壁不戰. <秦>數挑戰, <廉頗>不肯. <趙王>信<秦>之閒.  <秦>之閒言曰: <秦>之所惡, 獨畏<馬服君><趙奢>之子<趙括>爲將耳.  <趙王>因以<括>爲將, 代<廉頗>. <藺相如>曰: 王以名使<括>,  若膠柱而鼓瑟耳. <括>徒能讀其父書傳, 不知合變也. <趙王>不聽, 遂將之.

※기러기발 =안족(雁足)

■ 교학상장 敎學相長
[가르칠 교/배울 학/서로 상/자랄  장]

☞가르치고 배우면서 학업을 증진시키고 성장함
[출전]예기(禮記)』
[내용] 옥은 쪼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못하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도를 모른다. 이런 까닭으로 옛날에 왕된 자는 나라를 세우고 백성들에게 임금 노릇을 함에 교와 학을 우선으로 삼았다.

 비록 좋은 안주가 있더라도 먹지 않으면 그 맛을 알지 못하고, 비록 지극한 도가 있더라도 배우지 않으면 그 좋음을 모른다. 이런 까닭으로 배운 연후에 부족함을 알고 가르친 연후에야 막힘을 알게 된다. 부족함을 안 연후에 스스로 반성할 수 있고, 막힘을 안 연후에 스스로 힘쓸 수 있으니, 그러므로 말하기를,“남을 가르치는 일과 스승에게서 배우는 일이 서로 도와서 자기의 학업을 증진시킨다.”고 한다.

[유]口+卒啄同時 졸탁동시 : 새가 알에서 부화할 때 새끼가 안에서 톡톡 쪼는 행위와 어미가 밖에서 탁탁 쪼는 행위가 동시에 일어날 때 비로소 두꺼운 알이 깨진다는 말이다 

[원문]玉不琢이면 不成器요 人不學이면 不知道라. 是故로 古之王者는 建國君民에 敎學先學하니라. 雖有佳肴라도 不食하면 不知其味야요, 雖有至道나 不學하면 不知其善也니라. 是故로 知不足한 然後에 知不足하고 敎然後에 知困하니라. 知不足한 然後에 能自反야요, 知困然後에 能自强야니 故로 曰 敎學相長야니라.**肴(안주 효)

[풀이]벼는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배움이 깊을 수록 겸허(謙虛)해 진다는 뜻으로 비유해도 좋을 것이다. 학문이 아무리 깊다고 해도 가르쳐 보면, 자신이 미처 알지 못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스승은 부족한 곳을 더 공부하여 제자에게 익히게 하며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남김없이 받아 더욱 학식이 풍부한 인재로 성장한다

[예문]
▷ 멘토링 수기공모에서 금상을 차지한 황광원(26)씨는 “나와 같은 어려움 가진 사람들이 또 어딘가에 존재할 것임에 틀림없는데, 포기하지 말고 마음으로 또 그만큼의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가가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응원하고 싶다.”면서 “멘토링을 하면서 나 또한 자라고 있음을 느낀다.<2006 서울신문>

▷ 가르침은 배움의 확장의 계기이며, 배움은 가르침의 시작이다. 가르치는 이는 항상 스스로 더 배워야 하며, 가르침을 통해 스스로의 한계를 느끼면서 배움을 넓혀가야 한다. 이것이 선생과 교사의 운명이다.<2006 중앙일보>

■ 구맹주산 狗猛酒酸
[개 구/사나울 맹/술 주/ 실 산]

☞개가 사나우면 술이 시어짐. 한 나라에 간신배가 있으면 어진 신하가 모이지 않음 

[출전]『韓非者』 外儲說右
[내용]군주가 위협을 당하며 어질고 정치를 잘 하는 선비가 기용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한비자(韓非子)는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다.  송(宋)나라 사람 중에 술을 파는 자가 있었다. 그는 술을 만드는 재주가 뛰어나고 손님들에게도 공손히 대접했으며 항상 양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팔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집보다 술이 잘 팔리지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는 마을 어른 양천에게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양천이 물었다.  "자네 집 개가 사나운가?"  "그렇습니다만, 개가 사납다고 술이 안 팔린다니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사람들이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어떤 사람이 어린 자식을 시켜 호리병에 술을 받아 오라고 했는데 술집 개가 덤벼들어 그 아이를 물었소. 그래서 술이 안 팔리고 맛은 점점 시큼해지는 거요." 

[예문]"법제정을 통해 사행산업을 규제하라는 목소리에 재갈을 물린 것은 다름아닌 한나라당입니다. 대통령 말씀을 빚댄 유치한 정치공세는 즉각 중단되야할 것입니다."

한나라당은 또 양정철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의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답변태도를 빗대 사나운 개로 인해 주막집이 망했다는 구맹주산이라는 고사성어를 인용하기도했습니다.

 "주막집 주인이 개를 길렀는데 주인한테는 꼬리를 흔들고 그렇게 잘했다고 한다. 그런데 손님들만 오면 사납게 짖어가지고 결국 그 주막집에는 손님들이 오지 못해서 술이 쉬어버려 망했다는 것이다." <2006 동아일보>

■ 구미속초 狗尾續貂
[개 구/꼬리 미/이을 속/담비 초]

☞개꼬리를 담비의 꼬리에 잇는다. 좋은 것 다음에 나쁜 것을 잇는 것. 또는 쓸만한 인격자가 없어 형편없는 사람을 고관(高官)에 등용함. 벼슬을 함부로 줌.
담비[출전]晉書
[내용]서진의 재상 조왕륜이 천자를 내쫓고 즉위하자 자기편을 늘리기 위해 하인들에게까지 벼슬을 내리고 고관대작만이 쓸 수 있는 초선관[담비의 꼬리로 장식한 관]을 쓰게 함으로써 그 관을 쓴 사람 중에는 형편없는 자가 많았다.그래서 세인들이 "담비의 꼬리가 부족해서 개꼬리를 이엇다"고 욕을 했다

■ 구밀복검 口蜜腹劍
[입 구/ 꿀 밀/배 복/칼 검]

☞입으로는 달콤함을 말하나 배 속에는 칼을 감추고 있다. 겉으로는 친절하나 마음 속은 음흉한 것.
[유] 笑中有劍(소중유검)/ 笑裏藏刀(소리장도)/ 笑面虎(소면호) /面從腹背(면종복배)/ 敬而遠之(경이원지) /羊頭狗肉(양두구육) /表裏不同(표리부동)
[속담] 등치고 간 내먹는다. /웃음 속에 칼이 있다.(웃고 사람 친다.)

[내용] 당(唐 )나라 현종(玄宗) 때의 이임보(李林甫)는 임금의 총애를 받는 후궁(後宮)에게 환심을 사 재상에 올랐다. 그 후「권세와 지위가 장차 자기를 압박할 만한 사람은 반드시 여러 계책으로 제거하고 문학하는 선비들은 더욱 꺼려 혹은 함께 선한 체하다가 달콤한 말로 속이고 몰래 그를 함정에 빠뜨리니 세상 사람들이 '이임보는 입에는 꿀이 있고 배 속에는 칼이 있다'라고 하였다.

[원문]勢位가 將逼己者를 必百計去之하고 尤忌文學之士하여 或陽與之善이라가 啗以甘言하고 而陰陷之하니 世謂 林甫는 口有蜜이요 腹有劍이라. * 勢(세력 세) 逼(다그칠 핍) 忌(꺼릴 기) 啗(먹일 담) 陷(빠질, 함정 함)

[참고]歷史(역사)를 龜鑑(귀감)으로 삼는 까닭은 治亂(치란)과 興亡(흥망)의 자취를 통해 그 속에서 敎訓(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明君賢相(명군현상)이 있었던 때는 治世가, 昏主奸臣(혼주간신)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亂世가 따랐음을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唐 玄宗(당 현종·712∼755 在位)은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사실 中國의 歷代(역대) 帝王(제왕) 중 그 만큼 人口에 많이 膾炙(회자)되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의 일생은 온통 劇的(극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할머니였던 則天武后(측천무후)가 망쳐놓은 大唐帝國(대당제국)을 英明(영명)한 통치로 다시 일으켜 장장 30년에 이르는 유명한 ‘開元之治’(개원지치)를 이루었다. 당나라 최대의 太平聖代(태평성대)였다.

여기에는 물론 玄宗 자신의 지혜와 용기, 그리고 탁월한 정치력이 바탕이 되었겠지만 賢相의 登用 또한 빠뜨릴 수가 없다. 즉 그는 즉위 초부터 강력한 개혁정책을 밀고 나갔는데 이 때 그를 도왔던 이로 名宰相 姚崇(요숭)과 宋璟(송경)이 있다. 결국 천하는 未曾有(미증유)의 太平을 맞게 되어 기록에 의하면 도둑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재위 후반기의 天寶(천보·742∼755)시대는 판이했다. 玄宗의 聰明(총명)도 날로 흐려져 갔으며 忠臣(충신)은 사라지고 주위가 온통 奸臣(간신)으로 채워지면서 급기야 대당제국은 亡國(망국)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당시 대표적 奸臣에 宰相 李林甫(이림보)가 있었다. 宦官(환관) 高力士(고력사)의 추천으로 宰相이 된 그는 간사하고 陰險(음험)했으며 猜忌心(시기심)이 많아 자신보다 훌륭한 자는 눈뜨고 보지를 못했다. 결국 그에 의해 제거된 충신만도 張九齡(장구령), 嚴挺之(엄정지), 李適之(이적지), 李邕(이옹) 등 수십 명에 달했다.

그가 政敵(정적)을 제거하는 방법은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절대로 나서지 않고 남을 시켜 처리했으며 자신은 도리어 칭찬하고 다녔다. 그러면서 은밀히 온갖 죄상을 날조하고 뒤집어씌워 꼼짝 못하게 만든 다음 제거했다. 그래서 史家(사가)들은 그를 두고 이렇게 적었다.

“口有蜜, 腹有劍”(구유밀, 복유검)-입술에는 달콤한 꿀을 발랐지만 뱃속에는 무서운 칼을 품고 있다. 여기서 나온 말이 ‘口蜜腹劍’으로 겉은 웃는 낯이지만 속으로는 사람을 해칠 무서운 생각을 품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문화가 흐르는 한자]

[예문]
동업하자는 사람의 말이 너무 번드르르해 미덥지가 못한데, 혹시 구밀복검일지도 모르니 한 번 더 재고해 보시지요.

모든 정치인은 먼저 국리 민리를 걱정하고, 그 한계 안에서 당리를 궁리하며, 당리를 도모한 연후에 개인의 영달을 모색해야 한다. 특히, 민주주의 정치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해방 이후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그 연륜에 맞게 민주주의를 발전시키지 못한 큰 원인의 하나는 정치인이 입으로는 염불처럼 외고 다니면서 실지로는 개인적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분방한 데 있다.

더 이상 호남 민심을 운운하며 호남인을 욕보이지 말 기를 엄숙히 호소한다"며 "자신들의 정치 연명을 위해 평생의 소 임을 다한 DJ를 생각하는 척하면서 실제로 (DJ를) 파는 듯한 모습 은 볼썽사납다<2005 부산일보>

■ 구반문촉 毆槃捫燭
[두드릴 구/쟁반 반/만질 문/촛대 촉] 

☞쟁반을 두드리고 초를 만진다,어떤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오해함

[동]군맹모상(群盲摸象)·군맹무상(群盲撫象)·군맹평상(群盲評象)·맹인모상(盲人摸象)

[내용]옛날에 한 장님이 있었다. 그는 선천적인 장님이었으므로 태양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문득 태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몹시 궁금해졌다. 그래서 곁에 있던 사람에게 그 모양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태양은 동반(銅盤)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소." 그는 집으로 돌아와 동반을 찾아 구석구석 만져보고 두드려 보고는 '당당당' 하는 소리가 나자 잘 기억해 두었다. 그 후, 그가 길을 가는데 어떤 절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소리가 동반을 두두렸을 때 들은 소리와 같았으므로, 그 장님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말했다. 

"저것이 바로 태양이오." 그러자 그 사람은 장님에게 말했다. "아니오. 태양은 동반 같기도 하지만 촛불처럼 빛을 낸다오." 장님은 집으로 돌아와 즉시 초 한 자루를 찾아 만져보고는 그 모양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그는 약(대나무로 만든 구멍이 셋 또는 여섯 있는 피리)을 만지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이것이 정말 태양이다." 

■ 구사일생 九死一生
[아홉 구/죽을 사/한 일/날 생]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겪고 간신히 목숨을 건짐.
[동]만사일생[萬事一生]
[출전]초사(楚辭)』《사기(史記)》〈굴원열전(屈原列傳)〉
[내용]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겪고 겨우 살아난다는 말로, 비슷한 말에 십생구사(十生九死)가 있다. 굴원(屈原)은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시인이자 정치가이다. 초왕(楚王)의 일족으로 박학다식하고 변론(辯論)에 뛰어났기 때문에 많은 활약을 하였다. 회왕(懷王)의 신임을 얻어 삼려대부(三閭大夫:왕가를 다스리는 대부)에 올랐으나, 양왕(襄王) 때 모략을 받아 두 번씩이나 강남(江南)으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한 뒤 우국시(憂國詩) 회사부(懷沙賦)를 남기고 멱라수(羅水)에 빠져 죽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굴원열전(屈原列傳)〉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굴평(屈平:平은 굴원의 이름)은, 임금이 신하의 말을 듣고 분간하지 못하고, 참언(讒言)과 아첨하는 말이 왕의 밝은 지혜를 가리고, 간사하고 비뚤어진 말이 임금의 공명정대함을 상처내어 마음과 행실이 방정한 선비들이 용납되지 않는 것을 미워했다. 그리하여 근심스러운 생각을 속에 담아 〈이소(離騷)〉 한 편을 지었다.”이소(離騷)의 제6단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길게 한숨을 쉬고 눈물을 닦으며, 인생의 어려움 많음을 슬퍼한다. 그러나 자기 마음에 선(善)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비록 아홉 번 죽을지라도 오히려 후회하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雖九死 猶未其悔(유미기회)].’” 이 〈구사(九死)〉에 대하여, 《문선(文選)》을 편찬한 유량주(劉良注)는 이렇게 말했다. “아홉은 수의 끝이다. 충성과 신의와 곧음과 깨끗함[忠信貞潔(충신정결)]이 내 마음의 선하고자 하는 바와 같으니, 이 해(害)를 만남으로써 아홉 번 죽어서 한 번을 살아남지 못한다 할지라도 아직 후회하고 원한을 품기에는 족하지 못하다.”

구사일생(九死一生)은 유량주가 말한 이 ‘아홉 번 죽어서 한 번 살지를 못한다.’에서 나온 말로 죽을 고비에서 간신히 살아난다는 뜻이 된다. <두산백과>
[원문]又申之以攬  亦余心之所善兮  雖九死其有末悔

[예문]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다
그는 징용에 끌려갔다가 광복이 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다.
그는 친구의 도움으로 구사일생했다.

▷그를 독일 점령 하에 있는 폴란드의 한 게토 (유태인 집단 거주지) 로 데려간 사람은 피터 카소비츠 감독이다. 헝가리 출신 유태인인 그는 다섯 살 때 유태인 수용소에 끌려갔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경험이 있다.<한국일보>

▷ 데니 브라운을 접촉하고 개를 살해할 것을 부탁했다.선수금 1,000달러를 받고 성공하면 500달러를 추가로 받기로 한 브라운은 개들이 좋아하는 개껌으로 ‘루이’를 유혹해 한적한 공터로 데려가 도끼로 수차례 내리쳤으나 개는 구사일생으로 도망쳤다.

■ 구상유취 口尙乳臭
[입 구/아직 상/젖 유/냄새 취]

☞입에서 아직 젖내가 난다. 아직 어리다. 하는 짓이 어리석고 유치 하다.
[속담] 이마빡에 피도 안 말랐다./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출전] <史記>高祖紀
[내용]  한왕이 한신을 시켜 위왕 표를 치게 하면서 물었다. "유나라의 대장이 누구인고?"
누군가가 대답했다. "백직(柏直)입니다." 그러자 한왕이 말했다.  "입에서 젖비린내가 나는구나. 어찌 우리 한신을 당해낼 수 있겠는가?"
[원문]漢王以韓信魏王豹 問魏大將誰 左右對曰柏直 漢王曰 是口尙乳臭 安能當吾韓信

[예문]
▷ 나이 오십 줄에 들어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입에서 젖내 나는 년을 집구석으로 끌어 들이고 지랄을 버릇는 그게 사람이라고 생각하슈?…[염상섭(廉想涉), 『三代』]

▷ 우리 집에서는 새 며느리를 맞는다고 야단 법석을 하며 아직도 입에서 젖내가 제대로 가시지 못한, 열세살 먹은 꼬맹이에 冠帶(관대)를 입히고 紗帽(사모)를 씌워 나귀 등에 올려 앉히고 논틀을 건느고 산모롱이를 돌아 마을 앞을 지나고 고개를 넘어 이와 같은 길을 三十里 쯤이나 갔을까. 역시 어떤 農村 조그마한 초가집 앞에 내려 놓는 것이었다.≪이희승, 隨筆≫

■ 구십춘광 九十春光
[아홉 구/열 십/봄 춘/빛 광]

☞봄의 석 달 동안. 석 달 동안의 화창한 봄 날씨.
[예문]
▷ 유유창천(悠悠蒼天)은 호생지덕(好生之德)인데 북망산천아 말 물어보자. 역대제왕과 영웅열사가 모두다 네게로 가드란 말가, 경리안색(鏡裡顔色)을 굽어보니 검든머리 곱든 양자(樣姿) 어언간에 백발이로구나. 인간 칠십은 고래희인데 팔십장년, 구십춘광 장차 백세를 다 살아도 죽기가 싫어서 일러를 왔건만 하물며 아동초목으로 돌아가는 인생을 생각하면 긴들 아니 가련탄 말가≪엮음수심가≫

▷ 목화는 구름과 같이 몽실몽실 피는 곳 뒤뜰엔 봄이 오면 배나무꽃 만발하여 백설인가 놀라보면 여름 하늘 구름같고 뒷산의 꾀꼴새 맞아 구십춘광 즐겼지≪趙愛泳, 망향가≫

▷ 늦봄 멀구슬나무가 필 무렵부는 바람이 언뜻 겨드랑이를 스쳐도 옛가지는 다시 꽃필 마음이 없는 것이겠지요. 구십춘광 그리는 어리석음은 오직 늙음에 이른자의 몫입니다.≪김탁환 나,황진이≫中에서

■ 구여현하 口如懸河
[입 구/같을 여/매달 현/물 하]

☞입이 급히 흐르는 물과 같다. 거침없이 말을 잘하는 것.
[동] 口若懸河(구약현하) /靑山流水(청산유수)
[속담]말 잘하기는 소진 장의다./蘇張의 혀.(蘇陳張儀)

[내용] 진(晉)나라 때 곽상(郭象)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비범하고 어떤 사물을 유심히 관찰하여 그 이치를 밝히기를 좋아하였다. 도한 老子와 莊子의 사상을 즐기면서 연구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은 학자였다. 당시 그에게 여러 차례 관직에 나갈 것을 권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고사(固辭)하고 한가롭게 살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특히 남들과 여러 사상을 이야기하면서 즐기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는 여러 사람과 논쟁을 벌일 때마다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 이치를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잘 설명했고 아울러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하였다. 왕연(王練)이 이르기를「곽상의 말을 듣고 있으면 마치 흐르는 물이 큰 물줄기로쏟아져 마르지 않는 것과 같다.며 칭찬하였다.

[원문]廳象語면 如懸河하여 瀉水注而不竭이라
** 象(코끼리 상) 瞭(밝을 료) 練(익힐 련) 廳(들을 청) 瀉(쏟을 사) 注(물댈 주)

[예문]
청산유수 같은 말솜씨
▷ 그는 아버지의 질책에 청산유수로 자신의 변명을 늘어놓았다.
▷ 선생은 그 헌칠한 신수에 겸하여, 이야기가 또한 청산유수의 달변이었다.≪이희승, 먹추의 말참견≫
▷ 그의 말솜씨는 청산유수 같아서 사흘 밤 사흘 낮을 꼬박 같이 지내면서도 조금도 지루한 줄 몰랐다.≪박완서, 미망≫

▷ 우리는 흔히 청산유수와 같이 유창하게 쏟아지는 연설을 좋은 연설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막힘이 없이 유창하게 흘러가는 달변이 자꾸만 더듬거리는 눌변보다야 나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유창함 자체만으로 좋은 스피치가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며, 좋은 스피치를 하기 위해서 반드시 유창하여야 하는 것도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유창함은 좋은 스피치의 충분조건도 필요조건도 아니다. <광운대학 홈페이지>

■ 구우일모 九牛一毛
[아홉 구/소 우/한 일/터럭 모]

☞아홉 마리의 소 중에 하나의 털. 많은 것 가운데 극히 미미한 하나.

[동] 九牛毛(구우모) /滄海一粟(창해일속) /大海一滴(대해일적)-->물방울 적
[속담]아홉 마리의 소에서 털 하나 뽑기다.

[출전] 『한서(漢書)』司馬遷, 報任安書


[내용]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왕은 秦始皇(진시황)이지만 漢武帝(한무제)는 秦나라 보다도 몇 배나 더 큰 판도를 이룩했다. 동서남의 3방향으로 국력을 뻗쳐 영토를 확장했다. 동쪽으로는 우리나라까지 쳐들어와 漢四郡(한사군)을 설치했음은 周知(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武帝에게도 북쪽의 오랑캐 匈奴(흉노)만은 커다란 두통거리였다. 영토를 넓히기는 커녕 侵攻(침공)과 掠奪(약탈)을 당해야 했으니 大漢帝國(대한제국) 武帝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장군 李陵(이릉)을 시켜 匈奴를 치게 했지만 오히려 패하여 항복하고 말았다. 武帝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고 다들 李陵을 逆賊(역적)으로 몰아 부쳤다. 그러나 사기(史記)』의 저자司馬遷(사마천)만은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상하게 여긴 武帝가 그의 의견을 물어왔다. 司馬遷은 솔직하게 말했다.

“5000의 군사로 8만의 흉노 騎兵(기병)을 당한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무리입니다. 그가 항복한 것은 불가피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그는 李陵의 친구였다. 하지만 객관적 상황을 고려하여 한 말이 武帝의 노여움을 건드렸음은 물론이다. 결국 그는 下獄(하옥)되어 腐刑(부형·宮刑이라고도 함. 남자의 성기를 자르는 형벌)을 받고 말았다. 司馬遷은 극도의 치욕을 느낀 나머지 자살을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 司馬談(사마담)의 유언이 귓전을 때렸다. 역대로 史官(사관)을 맡았던 家門의 명예를 위해 중국 최초로 通史(통사·모든 왕조의 역사를 담은 것)를 남기라는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유언을 이어야했다.

또 이렇게 죽는다면 개죽음일 뿐이다. 사람에게는 泰山(태산)같이 위엄을 갖춘 죽음이 있는가 하면, 새의 깃털보다도 가벼운 죽음이 있지 않은가. 그것은 죽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 만약 자살로 끝맺는다면「가령 내가 법에 복종하여 죽임을 당할지라도 마치 아홉 마리의 소 중에 하나의 털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假令 僕伏法하여 受誅라도 若九牛亡一毛라.)동정은 커녕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을 것인 즉 그 명예는 누가 보상해줄 것인가. 」라고 하였다. 그의 심정은 그가 친구 任少卿(임소경)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유명한 ‘報任少卿書’(보임소경서)다. 九牛一毛는 여기서 나온 말로 ‘매우 하찮은 것’을 뜻한다. 

마침내 그는 자살을 단념하고 恥辱(치욕)을 감수한 채 通史의 저술에 매달렸다. 不朽(불후)의 명저 ‘史記’(사기)는 이렇게 하여 태어났다. .

[원문] 事未易一二爲俗人言也. 僕之先人非有剖符丹書之功, 文史星曆近乎卜祝之間, 固主上所 弄, 倡優畜之, 流俗之所輕也. 假令僕伏法受誅,  若九牛亡一毛, 與  何異

[예문]
▷ 이같은 분위기는 "자리를 차지하고 녹 만 축내는 시위소찬(尸位素餐)의 행태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한 고위관계자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위치에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며 "퇴진론은 수많은 쇄신안 중 한 의견인 구우일모(九牛一毛)에 불과하다"고 말했다.<한국일보 권노갑 퇴진 파문>

▷ 책에 실린 칠십여 편의 작품들은 구우일모 격인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런대로 그의 핵심을 이루는 요소로 편집되었으리라고 준구는 믿고 있다.≪이영치, 흐린 날 황야에서≫

▷ 미화 2천400만달러(약 225억원). 대부분 나라에겐 구우일모(九牛一毛)에 불과한 금액이다. 하지만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겐 정말 `큰 돈'인 것으로도 보인다.<2006 연합뉴스>

▷ 혹자는 중국 13억 인구에 북한 탈북자 정도야 구우일모 정도로 생각하겠지만 문제는 '인원 수'가 아니다. <2006 프레시안>

     

■ 구이지학 口耳之學
[아홉 구/귀 이/어조사 지/배울 학]

☞귀로 듣고 입으로 지껄이는 천박한 학문. 귀로 들은 것을 그대로 남에게 이야기하여 조금도 자기를 이롭게 하지 않고, 깊이가 없는 학문을 말함. ≒ 구이(口耳).
들은 것을 새기지 않고 그대로 남에게 전하기만 할 뿐 조금도 제것으로 만들지 못한 학문을 말한다.
[출전]《순자(荀子)》〈권학편(勸學篇)〉

(구이지학은) 소인의 학문이다. 귀로 들은 것이 입으로 나온다. 입과 귀 사이는 네 치일 뿐. 어찌 일곱 자의 몸에도 채우지 못하는가[小人之學也 入乎耳出乎口 口耳之間則四寸耳 曷足以美七尺軀哉(소인지학야 입호이출호구 구이지간즉사촌 갈족이미칠척구재)]."

군자의 학문은 귀로 들으면 그대로 마음에 삭이고, 신체에 정착하여 인격을 높이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사소한 말이나 동작도 많은 사람의 거울이 될 수 있다. 이에 반해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가면 곧바로 입으로 나온다. 즉, 들은 대로 즉시 타인에게 말하고, 조금도 자신을 수양하는 양식으로 두지 않는다. 귀와 입 사이는 겨우 네치 인데 그 사이동안만 신체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된다.

옛날 사람은 자신의 몸을 갈고 닦고 덕을 쌓기 위해 학문을 했으나 요즈음은 배운 것을 남에게 가르쳐서 생활의 수단으로 하기 위해 학문을 하고 있다. 군자의 학문은 자신의 학덕(學德)을 높이기 위한 것인데 반해 소인의 학문은 생활의 도구로 하기 위한 것이다. 순자가 지적했듯이 곧잘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싶어하며, 모르는 바를 아는 체 하는 것을 맹자(孟子)는 "사람들의 병폐는 자기가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되는 것을 좋아하는 데 있다"고 훈계하고 있다.

이 '구이지학'과 뜻이 비슷한 말로 《논어》〈양화(陽貨)〉편에, "길에서 설들은 것을 길에서 되받아 옮기는 것은 덕을 버리는 것이다[孔子曰 道聽塗說 德之棄也(공자왈 도청도설 덕지기야)]." 앞 길에서 들은 좋은 말을 마음에 간직하여 자신의 수양의 양식으로 삼지 않고 다음 길에서 곧 남에게 말해 버린다. 결국 '구이지학'과 같은 짓을 하는 것으로, 이것은 스스로 덕을 버리는 것과 같은 짓이다. 좋은 말은 모름지기 마음에 간직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덕을 쌓아야 한다는 뜻이다.<네이버백과>

[예문]
▷ 사헌부 대사헌 이칙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세적이 글을 읽었다지만 어찌 1, 2년의 구이지학으로써 능히 형옥의 중임을 감당하겠습니까?” 하였다.(司憲府大司憲李則等 上箚字曰…世勣雖曰讀書 豈可以一二年口耳之學 能堪刑獄重任乎) [성종실록 권제221, 7장 앞쪽~뒤쪽, 성종 19년 10월 4일(갑오)]  

■ 구절양장 九折羊腸 [아홉 구/꺽일 절/양 양/창자 장]

☞아홉 번 꺾인 양의 창자. 산길이 꼬불꼬불하고 험하다. 또는 세상이 복잡하여 살아가기 어렵다.
[예문]
구절양장 골마다 파고든 계류는 호남 의 고봉을 휘돌아 북으로 빠지고 그물길을 인도한  노령과 소백 두기둥 사이에 높은 지대를 이뤘다. 금강상류의 진안고원 운장산은 이 고원의 서북에 위치한 1,126m의 고산으로 호남평야를 굽어보며 노령봉 제일의 眺望을 연출한다.

▷ 비가 와 강물에 기운이붙으면 강원 산골의 목재를 이어 붙인 뗏목이 출발했다. 구절양장 정선과 영월의 골짜기를 돌아 안동에 닿았고 이어 남한강을 타고 한양까지 긴 여행을했다. 이 위험한 여행을 무릅쓴 이유는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이다. ‘떼돈’이라는 말은 그래서 만들어졌다. 영월의 동강뗏목축제(29, 30일)는그 시절의정한을 더듬는 행사이다.<한국일보>

■ 구화지문 口禍之門
[입 구/재앙 화/어조사 지/문 문]

☞입은 재앙의 문. 말을 삼가도록 경계.≒구시화문[口是禍門]
[유]病從口入 禍從口出 (병종구입 화종구출)

[출전]《전당서(全唐書)》〈설시(舌詩)〉
[내용] 입은 곧 재앙의 문이요, 혀는 곧 몸을 자르는 칼이다.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 처신하는 곳마다 몸이 편하다”이라 하였으며 '구화지문'은 여기서 나온 말이다.

 풍도는 당(唐)나라 말기에 태어났으나 당나라가 망한 뒤의 후당(後唐) 때에 재상을 지냈다. 후당 이래 후진(後晉), 후한(後漢), 후주(後周) 등 여러 왕조에서 벼슬을 한 사람으로, 그 동란의 시기에 73세의 장수를 누리는 동안 처신(處身)에 많은 경륜(經綸)을 쌓은 사람으로 위와 같은 처세관(處世觀)을 남겼다.

《주희(朱熹)》〈경재잠(敬齋箴)〉에도 독에서 물이 새지 않는 것과 같이 입을 다물고 발언에 신중을 기하라[守口如甁(수구여병)]고 했다. 우리 말에도 "화는 입으로부터 나오고 병은 입으로부터 들어간다." "모든 중생은 화가 입 때문에 생긴다"고 했다. <네이버백과>

[원문]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 閉口深藏舌 安身處處牢

■ 국사무쌍 國士無雙
[나라 국/선비 사/없을 무/짝수 쌍]

☞ 그 나라에서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선비. 매우 뛰어난 인재.
[동]一歲之雄(일세지웅) : 한 시대의 영웅이라는 말로 그시대에는 대적할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 로 뛰어난 인물. / 棟梁之材(동량지재)--기둥이 될 만한 인물

[출전]『史記』<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내용] 한왕 유방(劉邦)이 군사를 이끌고 남정(南鄭)으로 갈 때 길이 험하고 멀어서 도주에 이탈하는 자가 많아 군사들이 동요하자 한신(韓信)도 도망하였다. 그 때 승상(丞相) 소하(蕭何)가 그것을 알고 급히 한신을 쫓아갔다. 유방은 충복인 소하마저도 도망한 줄 알고 크게 낙담하고 있었는데 이틀 뒤에 한신을 데리고 돌아오니 유방이 꾸짖으며 다그쳤다.“왜 도망쳤는냐?”소하가“도망한 것이 아니라 한신을 잡으러 갔었습니다.”“다른 장수들이 이탈했을 때는 그렇지 않더니 유독 한신만을 쫓아간 이유는 무엇이냐?”

 소하가 말하기를“모든 장군은 얻기가 쉬울 따름이지만 한신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이 나라의 인물 중에 둘도 없습니다.(諸將은 易得耳나 至如信者는 國 士無雙이니다.)」 폐하께서 한중(漢中)의 왕만 되시려 한다면 그가 필요 없겠지만 천하를 소유하고자 한다면 한신 없이는 더불어 그 일을 도모할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원문]信數與蕭何語, 何奇之.至南鄭, 諸將行道亡者數十人, 信度何等已數言上, 上不我用, 卽亡. 何聞信亡, 不及以聞, 自追之. 人有言上曰: 丞相何  亡. 上大怒 如失左右手. 居一二日, 何來謁上, 上且怒且喜,  罵何曰: 若亡, 何也? 何曰: 臣不敢亡也, 臣追亡者.  上曰: 若所追者誰何? 曰: 韓信也. 上復罵曰: 諸將亡者以  十數, 公無所追;追信, 詐也. 何曰: 諸將易得耳. 至如信者, 國士無雙. 王必欲長王漢中, 無所事信;必欲爭天下, 非信  無所與計事者. 顧王策安所決耳. 王曰: 吾亦欲東耳, 安能鬱鬱久  居此乎?何曰: 王計必欲東, 能用信, 信卽留;不能用,  信終亡耳. 王曰: 吾爲公以爲將. 何曰: 雖爲將, 信  必不留. 王曰: 以爲大將. 何曰: 幸甚. 於是王欲召信  拜之. 何曰: 王素慢無禮, 今拜大將如呼小兒耳, 此乃信所以  去也. 王必欲拜之, 擇良日, 齋戒, 設壇場, 具禮, 乃可耳. 王許之.  諸將皆喜, 人人各自以爲得大將. 至拜大將, 乃韓信也, 一軍皆驚.

▷ 蕭(맑은대쑥 소) 何(어찌 하) 諸(모두 제) 易(쉬울 이)  

■ 국치비가 國恥悲歌
[나라 국/부끄러울 치/슬플 비/노래 가]

☞나라를 잃은 수치 부끄러움을 탄식, 노래한 작품.
[참고][송암유고]

    風雪交紛日 爲問北來使
    小海容顔苦 幾多耐嚴冬
    故國孤臣在 未死但垂淚

    풍설(風雪) 석거친 날에
    뭇노라 북래사자(北來使者)
    소해용안(小海容顔)이 언매나 치오신고,
    고국(故國)의 못 죽는 고신(孤臣)이 눈물계워 하노라.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염려하며 애절한 심경을 읊은 시조
*北來使者 : 북쪽 심양에서 온 심부름꾼(사자)
*小海容顔 : 우리 나라 왕자의 모습
*언매나 치오신고 : 얼마나 추우신가
*故國의 : 고국의 다음에 생략된 말 : '국치(國恥)에도'
*孤臣 : 필자 자신